[일요신문] 5일 방송되는 KBS1 '다큐온'은 '임란포로 진주시마의 후예들' 편으로 꾸며진다.
"교토 요도강변에 진주시마라는 섬이 있었는데 임진년에 진주에서 끌려 온 포로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줄잡아 10만여 명으로 이들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많은 포로들이 포르투칼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갔지만 일부는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중세 일본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임진왜란 포로들 중에서 일본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이들을 살펴본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일본은 끈질기게 조선에 국교 정상화를 요청했다. 이를 받아들인 조선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3번의 회답겸쇄환사와 9번의 통신사를 파견했다. 초창기에는 쇄환, 즉 포로 송환이 주 임무였으나 후기에는 일본막부 인정등 다양한 명분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
1719년 제9차 조선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동행한 신유한은 교토에 조선인 포로 집단거주지인 진주시마(진주섬)가 있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듣고 이를 그의 '해유록'에 기록으로 남겼다.
신유한의 해유록 중에는 '요도강 남쪽에 포로들이 사는 진주시마가 있었다'라는 글귀가 있다.
교토 역사자료관의 일본 측 기록에서는 진주시마를 찾을 수 없었다. 일본의 전문가들도 일본에는 진주시마 기록이 없다고 했다. 이들과 함께 진주시마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지막 성인 후시미성 남쪽 요도강변, 당시 조선통신사가 배에서 내리던 도진간기 근처가 진주시마로 추정되었다. 당시로서는 황무지였던 곳에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의 집단주거지가 있었던 것이다.
진주시마는 임진왜란 때 두 차례 전투가 벌어졌던 진주성 전투와 관련이 있었다. 특히 1593년의 2차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자 수많은 포로들이 끌려갔고 이 때 교토의 진주시마가 생겨났던 것이다.
일본의 주요 네 개의 섬 중에서 가장 작은 시코쿠, 그러나 시코쿠는 임진왜란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시코쿠의 영주 4명이 임진왜란에 참가했고 이 바람에 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시코쿠로 끌려왔다.
시코쿠 고치현의 현립도서관이 보관 중인 '토좌국직인가합'이라는 책자에 두부를 만드는 사람의 그림이 남아 있다. 그런데 두부 만드는 사람은 일본 복장을 한 조선인이었다. 조선포로였던 것이다. 이들 조선인 포로들이 만들기 시작한 두부는 단단한 모두부, 당시 연두부만 있던 일본의 식문화에 신기원을 이룬 것이었다.
시코쿠에 새로운 두부를 전파한 인물이 바로 박호인이었다. 그는 경주의 성장으로 진해성전투에서 일본군 포로가 된 인물이라고 일본 기록은 전하고 있다.
박호인은 두부를 만드는 조선인들의 총 책임자였고 고치성주는 이들에게 두부제조 독점권을 부여했다. 이렇게 박호인으로부터 시작된 고치두부는 단단한 특성 덕분에 다양한 요리에 활용되고 있다. 지금도 박호인 두부는 간기(唐人)두부라는 상표로 일본 전역으로 팔려나가고 있는데 포장지에는 이 두부가 한반도로부터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지도로 표기하고 있다.
고치현에는 지금도 박호인의 후손이 살고 있는데 노쇠한 후손도 박호인이 일본에 두부를 전파했다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인 포로 박호인은 중세 일본음식 문화에 일대 변화를 일으킨 주인공이었다.
정유재란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남원, 최근 남원문화원에서는 '조선국녀'라는 책자를 펴냈다. 남원성전투에서 역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어느 소녀에 대한 책이었다. 그런데 이 소녀는 뛰어난 직조 기술, 베 짜는 기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원성전투 당시 왜장 오다니 요쥬로는 직조 기술을 가진 소녀를 포로로 잡아갔다. 정유재란 때는 조선의 기술자들을 최대한 많이 잡아오라는 도요토미의 특명이 내려져 있었다. 일본으로 끌려간 소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시코쿠에 베틀과 직조 기술을 전파했다. 그리고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일본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치현 구로시오초, 작은 어촌 마을 뒷산에 그녀의 묘비가 남아 있다. 묘비에는 '조선국녀'라는 네 글자만 새겨져 있다. 오다니 가문에서는 그녀를 자신들 가문 묘역에 안장했고 그 후손과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작은 묘비를 돌보고 있다.
10만 여명에 이르는 조선인 임란 포로, 당시 국제 노예 가격이 폭락할 정도로 많은 조선인들은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렸다. 그러나 사람만 일본에 포로로 끌려 간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문화재도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시코쿠의 출석사라는 유서 깊은 사찰,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이 노획한 전리품을 봉헌한 사찰인데 이곳의 처마에 동종 하나가 걸려 있다. 몸체에 아름다운 비천상이 새겨진 동종, 이 조선종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이 동종이 한반도의 어느 사찰에서 온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출석사 측에서는 이 동종을 도난당할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조선에서 훔쳐간 장물을 도둑 맞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치현 사가와초의 어느 도서관 일본이 결코 공개하지 않는 불화가 한 점있다. 오랫동안 일본의 임란 포로들을 연구해온 울산대 노성환 교수가 입수한 불화 사진 그것은 한글 불화였다. 세조 때 간행된 월인석보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한글로 해석한 불화, 우리나라에도 없는 귀중한 불화였다. 특히 한글 창제 초창기의 표기법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이 한글 불화가 지금 시코쿠의 어느 도서관에 잠들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10만 여명의 포로 중에서 일본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이들을 살펴보며 돌아오지 못한 임란 포로들을 기억하는 것 또한 역사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는 점도 함께 짚어본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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