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길들이기’ 신호탄 쐈다
▲ 지난 2월 15일 이명박 대통령이 2018 동계올림픽 IOC실사단 환영 접견을 마친 뒤 한국 유치위원회 위원들을 격려하는 만찬자리에서 이건희 회장과 건배를 하고 있다. 사진 가운데는 김선주 동계아시안게임 스키 금메달리스트. 청와대사진기자단 |
“그런 소리를 듣고 가만있을 정권이 어디 있느냐.”
얼마 전 청와대의 한 고위 인사가 사석에서 던진 말이다. 그는 “집권이 2년이나 남은 현직 대통령에게 재벌 총수가 어떻게 ‘그딴’ 식으로 말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흔들림 없는 국정 운영을 위해서라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센 상황”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청와대 인사가 언급한 재벌총수는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지난 3월 10일 이 회장은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지난 10년에 비해 상당히 성장했으니 낙제점을 주면 안 되겠죠. 흡족하다기보다는 낙제는 아닌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결국 이 인사의 얘기는 ‘그날’ 이후 이 회장을 바라보는 청와대의 ‘불편한’ 심경을 드러낸 것이다. 이 회장은 정운찬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이 주장하던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서도 “기업가 집안에서 자랐고, 경제학을 공부했는데 그런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며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이 회장 발언이 전해지자 여권은 ‘발끈’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정부 정책의 지원을 받았던 유수한 대기업 총수가 낙제점수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서글프다”면서 “이런 인식을 어찌 가졌는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비판했다. 청와대 참모진도 “듣기 거북하다” “잘 아는 분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의아스럽다”며 이 회장에게 ‘쓴 소리’를 날렸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이 회장 발언 다음 날 열린 회의석상에서 불쾌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청와대 인사는 “2009년 12월에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특별사면을 해 줬던 사실을 이 회장이 잊은 것 같다. 배신감을 토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면서 “이 회장 영향력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한 기업의 총수일 뿐 아니냐. 나라의 경제 정책 전반을 논하는 데 있어서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 핵심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삼성은 “이 회장의 독특한 화법이 불러온 오해일 뿐”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항상 위기를 강조하는 이 회장이 “낙제는 아닌 것 같다”고 말한 것은 ‘괜찮은 수준’이라는 게 삼성 측의 설명이었다. 삼성은 청와대에도 이러한 뜻을 전하며 해명했다고 한다. 지난 3월 16일 김순택 미래전략실장은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이 회장이 매우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면서 “그동안 정부가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걸어 규제를 해소하고, 사업하기 좋은 정책을 펴 기업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도 직접 ‘불끄기’에 나섰다. 이 회장은 3월 31일 IOC 행사 참석차 출국하는 길에 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낙제점 발언으로 골치가 좀 아팠다”고 말문을 연 뒤 “뜻은 그게 아닌데 오해한 것 같다. 경제성장이 잘 됐고 금융위기를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빨리 극복하는 등 이런저런 면에서 잘했다는 의미였는데 잘못 전달됐다”고 말했다.
이 회장을 비롯한 삼성 최고 경영진의 재빠른 해명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의 격앙된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은 듯하다. 더군다나 최근 여권 내에서 재계에 대한 대통령의 ‘영’이 서지 않는다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던 차에 불거진 일이라 상당수 청와대 참모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통령 최측근으로 불리는 임태희 비서실장과 백용호 정책실장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한다.
청와대 정무라인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들 사이에서 2년만 버티면 된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대통령 ‘말발’이 잘 먹히지 않고 있다. 기름값과 통신비 인하를 놓고 관련 회사들이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대표적인 사례”라면서 “이럴 때일수록 재계 1위 삼성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삼성이 움직여야 다른 기업들도 따른다. 삼성에 밀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여권 핵심부가 삼성에 대한 ‘채찍’을 마련하고 있고, 이를 통해 재계의 군기를 잡으려 한다는 것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청와대 기류 속에 몇몇 사정기관들이 동시에 삼성을 겨냥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일요신문>이 접촉한 해당기관 관계자들은 이러한 ‘액션’이 “윗선으로부터 내려온 지시 (때문)”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도 사실상 청와대가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임태희 비서실장과 백용호 정책실장 등이 관련 내용을 ‘각별히’ 챙기고 있다는 말까지 들린다. 차기 법무부 장관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권재진 민정수석 역시 ‘실적’에 목말라하고 있다고 한다. 재계 일각에서는 지난 1995년 이 회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한국 정치는 4류, 행정과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라고 말한 뒤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뒤따랐던 사례를 떠올리기도 한다.
‘삼성 손보기’의 선봉은 국세청이 맡았다. 국세청은 지난 4월 4일 호텔신라와 삼성중공업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삼성물산도 2월부터 세무조사가 진행 중이다. 삼성의 핵심 계열사 세 곳이 국세청으로부터 세무조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삼성물산의 경우 최근 조사 인력을 늘리는 등 강도가 더 세졌다고 한다. 국세청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세무조사를 실시했던 삼성에버랜드에 대해서도 수백억 대의 세금을 추징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국세청 측은 “개별 기업에 대한 (세무조사)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삼성은 “정기적인 세무조사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지만 사실상 특별 세무조사에 가깝다는 게 국세청 안팎의 관측이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형식만 놓고 보면 정기 세무조사가 맞다. 특별 조사를 담당하는 서울청 조사 4국이 아니라 1·2국이 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도 “그러나 기간과 규모를 살펴보면 특별 세무조사로 봐야 할 것 같다. 한꺼번에 주요 계열사들을 조사하는 것도 이례적”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서울청 1국과 2국이 그 어느 때보다 의지를 보이며 경쟁하고 있다. 삼성물산을 맡고 있는 중부청도 성과를 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특히 국세청은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등의 해외법인 역외탈세에 대해서 집중적인 조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세청은 올해 1조 원 이상의 역외탈세를 찾아낸다는 목표를 세운 바 있다.
재계에서는 이번 국세청 세무조사가 삼성전자로 이어질지 주목하고 있다. 복수의 국세청 인사들에 따르면 삼성중공업 등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는 6월 이후 삼성전자에 대해서도 정기 세무조사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삼성 측은 “삼성전자 세무조사와 관련해 어떠한 통보도 받은 바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미 국세청 내에선 삼성전자 세무조사 실시를 기정사실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재계 일각에선 이 회장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이번 세무조사로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호텔신라, 삼성물산은 이 사장이 직·간접적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이 사장의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 호텔신라의 인천공항 루이비통 입점과 면세점 등에 대해서도 조사할 것으로 알려졌다. 더군다나 국세청은 ‘공정사회 구현을 위한 조세정의 실천방안’의 일환으로 경영권 승계 중인 재벌가 2·3세들을 집중 관리대상으로 삼고 있어 삼성으로선 긴장의 끈을 늦추기 힘들 듯하다. 이밖에 공정거래위원회와 검찰도 ‘삼성 옥죄기’에 동참할 전망이다. 공정위는 삼성전자의 불공정거래와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를 조사할 계획이고, 검찰은 현재 삼성 관련 ‘첩보’를 집중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에선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이 회장이 낙제라고 한 것도 아니고…”라면서 “전형적인 재갈 물리기 아니냐. 한마디로 말 잘 들으라는 것”이라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이어 그는 “경제통으로 자부하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 회장이 한마디 했다가 ‘괘씸죄’에 걸린 것 같다는 말이 파다하다”고 덧붙였다. 조만간 국세청이 고발할 것으로 알려진 4대 그룹 중 한 곳의 고위 임원도 “우리 회장님이 정권에 밉보여 강도 높은 세무조사가 뒤따랐다는 게 자체 분석이다. 최대한 몸조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청와대 측은 삼성을 비롯한 재계 사정작업에 청와대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시각에 대해 고개를 젓고 있다. 상황 논리만 가지고 평상적인 일선 사정기관의 활동을 너무 확대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계의 체감지수는 평소와 사뭇 다른 듯하다. 완연한 봄, 때 아닌 ‘사정의 계절’을 맞게 된 삼성과 재계의 시선은 자꾸 높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