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등 5곳서 대선 대리전…민주당은 ‘원팀’ 국민의힘은 ‘각개격파’ 양상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선거에선 1개 지역구에서 국회의원 재보선이 열렸다. 무대는 울산 중구였다. 이곳에선 제1야당이던 한나라당 후보와 정몽준 전 의원이 이끌던 국민통합21 후보가 맞붙었다. 집권여당 새천년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 여당과 제1야당의 대리전이 펼쳐지지 않은 재보선이었다. 이날 재보선에선 정갑윤 한나라당 후보가 여의도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당시 이 재보선은 여론의 관심 밖에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치열한 격돌 아래 여야 대리전 양상이 펼쳐지지 않으면서 큰 관심을 받지 못한 까닭이었다. 2002년 12월 이후 20년 동안 국회의원 재보선이 대선이 함께 치러진 사례는 없었다. 그러나 제20대 대선에선 국회의원 재보선이 대선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바로미터가 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5개 지역구에서 집권여당과 제1야당의 대리전이 펼쳐질 예정이다. 가장 관심도가 높은 지역은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내려놓은 ‘정치 1번지’ 서울 종로다. 청와대의 새 주인이 가려지는 날, 청와대가 위치한 지역구 국회의원도 함께 뽑히게 된다.
1년 전 제21대 총선 서울 종로에선 이 전 대표가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대표와 맞붙었다. 당시엔 ‘대선 전초전’이라는 타이틀을 달 정도의 빅매치였다. 두 정치인이 총선을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 결과에서 대선 후보 선호도 1, 2위를 차지했었기 때문이었다. ‘종로대전’을 기점으로 승자인 이 전 대표는 대선 주자로서 입지를 다졌고, 황 전 대표는 정치권 중심부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종로대전’ 승자 이 전 대표는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과정에서 국회의원직을 내려놓는 승부수를 띄우며 필승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이 전 대표는 경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패했다. 승부수는 적중하지 못했고, 재보선이 열리게 됐다. 정치권에선 대선과 함께 펼쳐지는 이번 ‘종로대전’에 출마하는 후보가 대선 후보들의 러닝메이트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얼마 전까지 국민의힘에선 이준석 대표의 종로 출마설이 돌았다. 이 대표도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알쏭달쏭한 단어를 언급하며 출마설에 불을 붙였다. 그러던 11월 8일 이 대표는 “종로에 출마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당대표로서 대선 지원에 전념하겠다는 의도다.
새롭게 종로 출마설 하마평에 오르내리는 인물은 2명이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 과정에서 ‘대장동 1타 강사’라는 별명을 얻은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와 ‘2차 컷오프 탈락’ 아픔을 맛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다. 당내에선 원희룡 차출설이 적잖은 공감을 얻고 있다는 후문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선 현재 종로구에 거주하는 ‘헤비급 인사’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종로대전 참전 가능성이 유력하게 오르내린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0월 27일 BBS라디오 ‘박경수의 아침저널’에 출연해 “종로에 거주하고 있는 분 중에서 민주당이 추천할 수 있는 중량급 인사는 사실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유력하다”고 했다. 여권 내부선 중량감과 지역 밀착형 인재라는 점에서 임 전 실장 거론 빈도가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약점 중 하나로 꼽히는 ‘여성 표심’을 잡기 위해 여성 후보들이 러닝메이트로 등장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나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다. 서울 종로에서 당선된 경험이 있는 정세균 전 국무총리 출격설도 있지만,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떤 상황이든 여야가 거물급 인사로 맞불을 놓으며 종로에서 다시 한번 흥미로운 매치업이 성사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전통적인 보수 강세 지역으로 꼽히는 서울 서초갑도 재보선 대상 지역구다.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이 부친을 둘러싼 농지법 위반 논란을 계기로 의원직을 사퇴한 지역구다. 이곳에선 국민의힘 내부 공천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4인의 여성 정치인이 주인공이다. 조은희 전 서초구청장을 비롯해 전희경 전 의원, 정미경 국민의힘 최고위원, 이혜훈 전 의원 등이 서초갑 후보 자리를 놓고 각축전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민주당에선 이정근 서초갑 지역위원장의 출마설이 나온다. 이 위원장은 서초갑에서만 4차례 선거를 치러 모두 패배한 바 있다. 총선에서 3번, 구청장 선거에서 1번 졌다. 재보선 당선 자체에 무게를 두기보다 대선 러닝메이트로 공헌할 수 있는 지역 밀착형 정치인이란 평가가 나온다. 이 밖에도 강남3구 야권 지지세 확산 방지를 위한 거물급 전략공천 가능성이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는 후문이다.
경기 안성에서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한 이규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공석을 메우기 위한 재보선이 펼쳐진다. 국민의힘에선 이 전 의원과 1승 1패 전적을 갖고 있는 3선 출신 김학용 전 의원의 출마 가능성이 유력하게 점쳐진다. 민주당에선 윤종군 경기도 정무수석, 임원빈 전 경기 안성 지역위원장이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 이 지역구에서도 민주당이 ‘전략공천’ 카드를 고심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음은 충북의 ‘정치 1번지’라 꼽히는 청주 상당 지역구다. 정정순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당선 무효형을 선고받아 공석이 된 지역구다. 국민의힘에선 정우택 전 의원이 청주 상당으로 컴백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4선 출신 정 전 의원은 19, 20대 총선 청주 상당에서 당선증을 거머쥔 바 있다. 21대 총선에선 ‘보수 험지’라 불리는 청주 흥덕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대선 캐스팅보트를 쥔 충청 지역에서 승리를 이끌 수 있는 확실한 카드로 정 전 의원이 거론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밖에도 민주당에서 건너온 오제세 전 의원도 하마평에 오르내린다.
민주당에서도 청주 상당 재탈환을 두고 후보 선정에 신중을 기할 것으로 보인다. 충북 출신 여권 인사 중 거물급을 지역밀착형 러닝메이트로 내세우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청주 상당 출격 가능성이 거론되는 인사론 노영민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시종 충북도지사가 있다. 충북 청주 상당 재보선은 ‘충청을 잡는 자가 대권을 잡는다’는 속설을 입증할 바로미터 역할을 할 수 있는 승부처로 예상된다.
대구 중·남구 지역구에선 곽상도 전 의원 빈자리를 채우는 재보선도 펼쳐진다. 곽 전 의원은 아들을 둘러싼 ‘화천대유 50억 퇴직금 논란’을 겪은 뒤 11월 11일 의원직을 사퇴가 확정됐다. 보수 성향이 강한 TK(대구·경북) 특성상 국민의힘 내부 공천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보인다.
김재원 국민의힘 최고위원을 비롯해 임병헌 전 남구청장, 윤순영 전 중구청장, 도건우 전 경제자유구역청장, 이인선 수성을 당협위원장 등의 이름이 나온다. 민주당에선 대선과 맞물린 선거전에서 파급력을 보일 수 있는 ‘전국구 정치인’을 대구 중·남 지역구에 전략공천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대선과 함께 펼쳐지는 국회의원 재보선을 둘러싼 여야의 시각이 약간은 다르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민주당은 각 지역구에 중앙당 차원에서 지명도를 갖춘 인물을 전략공천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대선 러닝메이트 성격을 띠는 후보를 고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라면서 “국민의힘에선 각 후보들이 출격 준비를 마치고 각축전을 펼칠 양상이다. 각 지역구에서 독립적으로 싸울 수 있는 후보가 경쟁력을 가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치평론가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연구위원은 “민주당과 국민의힘 대선 경선 시기가 달랐기 때문에 재보선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약간의 차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채 연구위원은 “대선 경선을 일찍 마친 민주당은 국회의원 재보선을 이재명 후보를 중심으로 치르는 방향성을 잡는 데 집중하고 있는 양상”이라면서 “경선을 얼마 전에 마친 국민의힘의 경우엔 윤석열을 중심으로 한 당내 교통정리가 아직 끝나지 않아 원외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이 거론될 수 있다”고 했다.
채진원 연구위원은 “이런 상황적 배경으로 인해 민주당에선 재보선 프레임을 ‘이재명 원팀’으로 잡았고, 국민의힘은 ‘각개격파’ 형식으로 초반 흐름을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