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놓고 방치 땐 망가지기 십상
▲ 손흥민(함부르크)은 축구협회 유학 프로그램을 통한 유럽 진출 성공 사례로 꼽힌다. 연합뉴스 |
#부진한 유럽 리거
“아이고, 소속 팀에서 제대로 뛰지 못하는데 어떻게 데려와?”
국가대표팀 조광래 감독의 이유 있는 한마디였다. 3월 2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온두라스와 A매치를 앞두고 조 감독은 독일 분데스리가 듀오 구자철(VfL 볼프스부르크)과 손흥민(함부르크)을 과감히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했다.
소속팀 내 입지 강화를 위한 배려의 측면도 있지만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둘의 퍼포먼스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안타까움이 물씬 풍기는 대목이었다.
해외파에 대한 조 감독의 생각은 간결하다. 주기적으로 꾸준히 출격해야만 대표팀에서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입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조 감독은 “유럽과 국내 선수들을 똑같은 입장에서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꾸준히 출전할 수 있어야 나중에 대표팀에 소집된 이후에도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잘라 말했다.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셀틱에서 활약 중인 기성용이 대표적인 예. 기성용은 입단 초기 주전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난 경험이 있다. 대표팀 합류 이후에도 한동안 어려움을 겪은 것은 당연지사.
한 축구인은 “자신감 문제가 가장 크다. 출전 시간이 줄고, 기회가 점차 줄어든다면 선수들은 자신을 잃고, 자칫 자괴감까지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몸도, 마음도 상해 돌아온다면 해외 진출이 주는 의미가 있는지도 되새겨봐야 한다”고 했다.
네덜란드 에레디비지에 최고 명문 팀 아약스에 몸담고 있는 석현준도 요즘 극심한 부침을 겪고 있다. 올해 초 이미 팀으로부터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은 그는 1군이 아닌, 2군 무대에서 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잊혀진 스타(선수)’ 대열에 이미 올랐다는 최악의 시선마저 있다.
올림픽대표팀 홍명보 감독의 생각도 조 감독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홍 감독은 “대책 없는 무분별한 해외 진출은 선수 보호를 위해서라도 지양해야 한다”는 입장을 오래 전부터 견지해 왔다.
여기서 ‘무분별한 해외 진출’이라 함은 선수 본인이 좋아하는 팀에 입단할 가능성이 희박한 K리그 신인 드래프트를 피하기 위해 많은 유망주들이 일본 J리그로 떠나는 세태를 지적하는 표현이었으나 어느 정도 유럽 진출과도 유사한 점이 많다.
#철저한 관리의 필요성
“일단 현지에 던져놓기 바쁠 뿐,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으니까….”
축구인 모두가 한 목소리를 냈다. 사후 관리의 중요성과 필요성이다. 지금 사정이 어찌됐든 팀 내 1군 스쿼드에 이름을 올린 구자철과 손흥민, 프랑스 르 샹피오나 발랑시엔 남태희 등은 솔직히 나쁜 상황이 아니다.
그래도 이들은 행복하다. 구단에서 철저한 관리를 해주고 있어 본인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희망의 유무는 큰 차이가 있다.
한때 한국 축구의 유럽 진출의 중축을 이룬 대한축구협회 차원의 유망주 유학 프로그램을 살필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다. 협회가 해당 선수들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지속적으로 해준 때문이다. 잘 알려졌지만 벨기에 명문팀 로얄 안트워프를 거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레딩FC, 풀럼FC 등지에서 뛴 설기현(현 울산)도 이 과정을 거쳤다. 손흥민도 함부르크에서 유학했다.
이렇듯 협회의 유학 프로그램을 거친 선수들은 K리그로 돌아온 뒤에도 빛을 발하며 축구 선수로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전남 드래곤즈 지동원과 수원 삼성 이용래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반해 에이전트, 에이전시, 사설 유학업체 등 또 다른 루트를 통한 유럽행은 좀 더 세밀한 확인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끝까지 계약 선수들을 책임지는 좋은(?) 일부도 있지만 대개 ‘유럽 진출’에 포커스를 맞출 뿐, ‘관리’까지 해주는 경우는 드물어 성공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시선이 많다.
과거를 보면 많은 유망주들이 이름을 알릴 기회조차 없이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과정은 차치하고 아쉬움이 많았다. EPL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유소년 클럽에 입단했던 이산은 특집 TV 방송까지 편성될 정도로 한때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지만 하부리그를 전전하더니 이젠 잊혀진 인물이 됐다. 프랑스 소쇼FC를 거쳤던 조원광도 마찬가지. 둘은 당시 내로라했던 최고 유망주들이었다. 지금도 축구계에는 이들이 제대로 성장했다면 박주영(AS모나코) 못지않게 크게 성공했을 것이란 한탄이 나온다. 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역시 관리 부실이 컸다.
한 에이전트는 “유럽은 18~20세 정도를 성인으로 본다. 더 어린 나이에 유소년 클럽에 입단하는 경우는 엄밀히 ‘해외 진출’이 아니다. 좋게 봐도 ‘연수’ 개념으로 따져야 한다. 또한 상위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피라미드 구조상 실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고선 아시아 선수가 유소년 팀에서 성인 스쿼드로 진입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와 진배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더욱이 요즘 들어 상당수 유럽 리그들은 자국 선수 보호를 기치로 내걸고 있다. 실력이 서로 비슷하다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먼 아시아권 선수를 영입할 턱이 없다. 설 자리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 역시 이러한 연유에서다.
손흥민이 포함된 6기생을 마지막으로 지금은 명맥이 끊긴 축구 유망주 유학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축구협회의 한 핵심 관계자의 지적도 흥미롭다.
“교육적 측면까지 고려해야 한다. 축구 선수로 성장하지 못할 경우도 대비해야 한다. 일부 유학생들은 축구 연수 기간을 마친 뒤에도 계속 잔류를 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성공을 못해 현지 PC방 등을 전전하는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된 사례도 있다고 들었다. 협회 프로젝트도 비리가 발생하는 등 완벽한 감독관리가 어려웠는데, 검증되지 않은 사설 업체들을 통한 무분별한 해외 진출의 부작용은 말할 것도 없다.”
막연하고 대책 없는 조기 해외 진출은 오히려 부메랑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