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가깝고 정부 지원은 멀었다
▲ 히로시마 원폭 피해로 반세기 넘게 방사능 고통 속에 살아온 김용길 대표. 그는 방사능 피해에 안전하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유출 추이를 지켜보며 누구보다 가슴 졸이는 사람들이 있다. 국내에 생존한 1기 방사능 피해자들이다. 현재 한국에는 2600여 명의 방사능 피폭 피해자들이 기구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태평양 전쟁,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발, 나가사키 조선소에 강제징용됐다가 방사능 피폭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반세기도 더 지난 일이지만 직접 히로시마 원폭 현장 가까이에 있었고, 그 이후 인체에 유입된 방사능으로 인해 고통스런 삶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이번 일본 대지진 사태는 내 일처럼 생생하게 와 닿을 수밖에 없다.
국내에 생존해 있는 방사능 1기 피폭 피해자를 만나 방사능 피해 실태 및 기구한 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일본 원전 사태 이후 방사능 인체 유입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방사능이 인체에 유입되더라도 약품이나 진료를 통해 그 양을 반감시킬 수 있다며 안전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 방사능 피해를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김용길 대표는 “방사능의 위력은 아직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며 평생을 괴롭혀 온 원폭 후유증에 대해 털어놨다. 김 씨는 다섯 살 때 히로시마 인근에 살다 원폭의 피해를 입었다. 이후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몸으로 경험했던 방사능이기에 누구보다 앞으로 벌어질 2, 3차 피해에 대해 염려하고 있다.
김 씨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 방사능에 직접 노출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집에 들어와 현관문을 닫는 순간 ‘쾅’하는 굉음이 귓전을 때렸다고 한다. 따라서 김 씨의 경우는 대기 중에 전해진 방사능 유출 물질이 호흡기를 통해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 씨는 어머니와 함께 초등학교에 마련된 대피소로 피신했다. 그러나 낡은 교정은 방사능의 영향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김 씨는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하다. 지금 일본 대지진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대피소에 모인 사람들은 밤낮으로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어지러움증을 호소했다. 며칠 지난 후에는 체내에 남은 방사능 물질이 켈로이드 성 피부염을 일으켜 참을 수 없는 가려움에 시달렸다”고 회고했다.
이후 이 씨의 가족들은 일본 현지에서 벗어나 국내로 돌아왔지만 악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체내에 잔류한 방사능 물질은 각종 암을 발현시켰다. 특히 소화기관 쪽의 질병이 자주 발생했고, 일시적인 근육마비 증상도 자주 몸을 괴롭혔다. 원전 폭발사고 시 대기 중에 30여 종의 방사성 물질이 방출되는데 이 중 세슘이 체내에 축적됐기 때문이다. 세슘의 경우 근육 등에 축적될 수 있고, 호흡기와 위장관에 잔류하는 동안 암세포 생성이나 통증을 수반할 수 있다.
김 씨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각종 암과 질병 때문에 당장 막대한 수술비와 의료비가 필요했다. 김 씨와 같은 국내 방사선 피해자들은 원자력 폭발 당시 피해를 입을 만한 인근 거리에 있었다는 증명 서류와 이를 증언해 줄 증인 2명을 세워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 조사를 통과하면 보건복지부에서 제공하는 건강수첩을 받고, 원폭 피해자로 지정돼 의료비 지원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보건복지부는 건강수첩을 소지한 피해자들에게 월 10만 원 상당의 의료보험 혜택과 200만 원 이상의 의료비가 지출 될 시 초과분 중 본인부담금(치료비의 약 20~30%에 달하는 금액)에 대해 지원하는 정책을 입안했다.
그러나 정부가 제시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강제 징용자로 나가사키 조선소에 일하러 갔다 방사능 피해를 입었거나, 태평양 전쟁 당시 방사능에 노출된 피해자들이 피해사실을 증언해 줄 목격자나 서류상으로 인근 거리에 거주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증명할 수 없다면 방사능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본인이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방사능 피해자들 중에는 피폭 현장 가까이에 있지는 않았지만 일본 현지에서 오염된 식수나 음식물을 섭취해 이후 증상이 발현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들은 체내에 남은 방사능 물질에 대해 의학적 검증을 받을 수 없어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방사능 피해가 1세대에서 그치지 않을 거라는 우려 역시 현실로 다가왔다. 때문에 방사능 피해자들은 자녀를 낳을 때 기형아가 출산될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또 다른 피폭 피해자 박 아무개 씨(76)는 “아내에게도 결혼 당시 피폭자임을 밝히지 못했다. 자녀를 낳을 때마다 행여 건강에 이상이 있는 아이가 나올까봐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기 방사능 피해자들의 자손들이 건강에 이상이 있거나 기형아를 출산하더라도 이 부분에 대해선 아직 의학적으로 인과관계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아 대를 물려 진행되는 방사능 피해까지 지원을 받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러한 방사능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그냥 간과할 수 없는 까닭은 현재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출된 방사능이 바다오염과 식품오염 등을 통해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식품이 인체에 축적되면 공기 중의 방사성 물질보다 인체엔 더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방사능 피해자에 대한 국내 의료체계와 대책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의학적으로 체내에 남아 있는 방사능의 양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동남권원자력의학원 정동혁 연구원에게 자문을 구했다. 정 연구원은 “몸 전체를 스캔해서 각 카운터(부분) 당 일인 안정 기준량인 1밀리시버트 이상의 방사능이 검출되는지를 통해 그 피해 여부를 충분히 검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증거를 가지고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보건복지부 질병정책과에 문의를 했다. 기자와 통화한 복지부의 한 관계자는 “현재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것은 히로시마 원전 사태나, 태평양 전쟁, 나가사키 조선소에 강제 징용됐다 피해를 입은 경우로 제한돼 있다”고 말했다.
국내 전문가들은 방사능 피해자와 향후 후유증에 대해 “일본 원전사태로 인해 국내에 피해자가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세계 의료전문가들의 견해는 사뭇 다르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3월 21일 “음식에 함유된 방사성 물질을 고스란히 섭취할 경우 인체에 축적될 수 있다”면서 “공기 중의 방사성 물질은 수일 내로 분산되지만 건강에 미치는 위험성은 크다”고 밝혔다.
프랑스 원자력안전위원회(ASN) 역시 “일본의 방사성 누출 영향은 수십 년 동안 대처해야 할 문제”라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