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공포’ 첫 단추 CIA가 끼운 셈
▲ 일본 도쿄전력이 지난 4월 후쿠시마 원전에 고인 방사성 물질 오염수를 대형 펌프를 이용해 옮겨 담고 있다. 작은 사진은 쇼리키 마쓰타로 전 요미우리신문 사장. AP/연합뉴스 |
암호명 포담(podam), 포잭팟원(pojacpot-1).
쇼리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책 <원전, 쇼리키, CIA>에 따르면 CIA의 쇼리키 관련 자료뭉치에 위 두 암호명이 쓰여 있으며, 쇼리키를 ‘에이전트’로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 에이전트는 지속적인 협력과 정보 제공을 담당하는 CIA의 공작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CIA와 쇼리키가 밀월 관계를 맺게 된 첫 계기는 1953년 쇼리키가 요미우리신문 사장으로 사세를 넓히던 중 일본 내 마이크로파 통신망 건설을 추진하면서부터다. 마이크로파 통신망이란 2차 대전 시 군사레이더 등에 쓰이던 것을 상용화한 것으로 매우 짧은 파장을 이용해 음성·영상·문자의 대용량 송수신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쇼리키는 이를 이용해 통신사업자로 나설 야심을 키웠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직접 통신망을 소유하면 방송은 물론 장거리 전화·무선 등 모든 미디어를 한꺼번에 얻는 셈이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인 당시 미국은 행여나 일본이 공산국가가 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차에 내심 쇼리키가 통신망을 소유하는 게 좋다는 생각에 무려 1000만 달러에 이르는 차관을 빌려주려 했다고 한다.
쇼리키는 일제시대 사회주의자와 정치범을 잡아들이는 일본 경시청 형사과장 출신으로 미국 측은 쇼리키를 ‘반공주의자’로 여겼다. 실제 쇼리키를 CIA 공작원으로 추천한 이도 미국 상원의원 칼 문트로 알려졌는데, 냉전기 아시아에서 반공을 내세운 정보통신망 구축안 ‘비전 오브 아메리카’를 구상해 발표한 인물로 유명하다. 쇼리키는 자신의 통신망 건설 계획을 ‘문트 미션’이라 부르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그런데 쇼리키가 통신망을 미국에 넘겨 주려한다는 괴문서가 떠돌고, 또 쇼리키를 견제하려는 당시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반대 등으로 인해 통신망 장악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쇼리키는 미 정부 관계자 및 군산복합체(거대한 군사기구와 군수 관련 대기업) 관련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쇼리키가 배제된 일본의 마이크로파 통신망 건설에는 GE(제너럴 일렉트릭스), GE의 자회사인 RCA, 유니텔, 피코 등 미국의 큰 전기 통신 업체가 참여했는데, 쇼리키는 자신이 창설한 니혼TV에서 사용하는 카메라를 RCA사로부터 대부분 구입했을 정도였다.
이후 쇼리키는 니혼TV 전무이자 자신의 심복인 시바타 히데토시를 중간에 세우고 일본에 파견된 CIA요원 다니엘 스탠리 왓슨과 접촉하게 된다. 왓슨이 부임한 1954년 무렵 일본에는 반미 여론이 들끓었다. 소련과 경쟁하듯 원자폭탄 실험을 거듭하던 미국은 1954년 태평양 비키니 산호도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했는데, 근처에서 고기를 잡던 일본어선 ‘다이고후쿠류’의 어부들이 피폭됐다. 미 당국이 어부들을 스파이로 취급하며 피폭 증상을 보여도 ‘간염에 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선장이 사고 반년 만에 피폭 증세로 사망하자 일본 내에서는 반핵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그래서 왓슨의 임무는 ‘대일본심리전(작전명 PSB D-27)’이었다. 이 작전에는 CIA 외에도 극동군사령부 등도 관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전 목표는 일본 내 반미 분위기를 잠재우고 원자로 보급에 힘쓰는 것이었는데, CIA는 이에 안성맞춤인 공작원이 바로 쇼리키라 판단했다. 쇼리키가 운영하는 <요미우리신문>은 당시 200만 부를 발행하는 거대 신문으로 사회적 영향력이 지대했다. 또한 쇼리키가 니혼TV 개설에 필요한 거액의 자금을 일본 재계 실업가들에게서 수완 좋게 척척 꿔오는 모습을 이미 지켜봐온 터라 원자로 수출 등에 필요한 인맥 활용 등에도 적격이라 본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에너지 자원이 별로 없는 일본이 심각한 전력난을 겪으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자 사회가 빈곤해 공산화가 진행되면 큰일이라 판단해 아무리 일본이 2차 대전 당시 적국이라 해도 우라늄과 원자로를 줘야 한다고 봤다. 또 원전 분야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GE는 당시 이미 일본으로 원자로 수출 계획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일흔에 접어든 쇼리키는 미국이 원하는 대로 원전 홍보에 힘쓴다면 자신이 총리가 되고 통신망을 거머쥘 날이 머지않았다고 보고 일본 내 원전 선전에 혼신의 힘을 불살랐다. 역설적이게도 쇼리키는 주변에 종종 가정용 발전기로 사용할 소형원자로를 구입해 집에 설치하겠다는 말을 하는 등 원자력에 대해 매우 무지했다.
1955년 5월에는 세계 최초로 핵잠수함을 개발한 미국 군수업체 GD(제너럴 다이내믹스)의 사장 존 홉킨스를 단장으로 한 ‘원자력평화사절단’ 9명을 사비를 털어가며 일본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또 그해 1월부터 방일 직전까지 다섯 달간 되풀이하며 <요미우리신문>에 사절단의 방일 소식을 알리기도 했다. 아리마 교수는 “끊임없는 보도로 당시 어느 누구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원자력’, ‘평화’란 말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시켰다”고 분석했다.
여세를 몰아 쇼리키는 1955년 12월에는 <요미우리신문> 주최로 ‘원자력평화이용박람회’를 열었는데, 핵무기를 전시한 수준이었는데도 불구하고 36만 명이 몰려들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CIA는 이 박람회를 분석한 문건을 아예 따로 만들었는데 관람객의 직업과 팸플릿 구입 여부, 박람회 전후의 일본 국내 언론 보도 내용 등을 상세히 기록했다고 한다.
이후 쇼리키의 총리 등극 야심을 알게 된 미국은 이를 매우 부담스러워 해 원자로 제공 등을 꺼리는 사이 쇼리키가 영국의 원자로 구입을 추진했다. 이에 CIA가 격노해 쇼리키와의 관계를 끊었다고 한다.
한편 아리마 교수에 따르면, 쇼리키 이외에도 CIA 비밀 문건에 등장하는 일본 공작원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사람과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각기 세 명 정도씩은 있다고 한다.
조승미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