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42>
▲ 강화 화문석문화관에서 화문석을 만들고있는 모습. |
돗자리는 성긴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고, 빈틈없이 짜였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너그럽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고 정이 간다. 여름에는 통풍효과가 좋고 겨울에는 냉기를 흡수한다. 오래 쓰더라도 윤기가 쉬 사라지지 않고 질겨서 잘 부스러지지 않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화문석 또는 꽃돗자리라고 하면 선뜻 강화도를 연상할 만큼 강화도는 돗자리 제조로 유명했다. 그 가운데 일등품은 교동도에서 나는 등메로 왕골(莞草)을 재료로 하는 화문석과 달리 교동도에서만 나는 참골을 재료로 짰다.
▲ 사진설명.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 |
무늬에 멋이 있다. 골에 빨강, 파랑, 자주, 노랑, 남, 흑, 백의 일곱 색을 들이는 데서 시작하여 백색 위에 문양대로 수놓는 데만 보름씩 걸렸다.
십장생문은 가장자리에 난간무늬를 놓고 위로부터 산과 일곱 색 구름, 백학, 황학, 바위 위에 송죽, 사슴 한 쌍과 물을 안은 수진거북, 산을 안은 산진거북, 불로초, 물의 순서로 무늬가 놓였다.
호문석(虎紋席)은 난간무늬와 소나무 바위 아래 까치 한 쌍이 날고 바위 틈에 불로초 서너 대궁이가 돋아 있는데 입을 벌린 호랑이가 험상궂게 앉아 있는 무늬다.
만화문석(萬花紋席)은 난간무늬 안에 갓집을 지어 속에 수(壽) 복(福) 강(康) 령(寧)의 네 글자를 넣고 아래로 팔엽 꽃, 석류, 봉황, 사방이 막힌 수복자를 놓은 것이다. 혼례 때 신랑신부가 썼다.
색7자문(色七字紋)은 색깔도 수복강령과 황학백학을 놓고 단수복을 들인 것으로 중년부부가 즐겨 썼다.
강화 화문석은 고려 중엽부터 가내 수공업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39년 동안 수도였던 강화에서는 왕실과 관료를 위해 최상품 왕골 돗자리를 제작했다. 송나라와 원나라에도 수출되는 인기품목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청나라와 일본에 보내는 선물로 명성이 자자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도 화문석만큼은 높은 품질을 인정해 장려했다.
▲ 강화 화문석문화관내 체험 학습장에 전시되어 있는 강화 화문석들. |
돗자리의 원산지는 강화로 치지만 전남 보성의 용문석 또한 유명하다.
서구의 카펫에 밀려 이제는 거의 사라진 ‘동아시아의 걸작품’ 돗자리를 현대식으로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돗자리의 보송보송한 촉감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