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대통령, ‘땜빵’ 장관, 선거 전략가 등 소재와 캐릭터 다양…리더 이방원 다룬 사극도 주목
최근 공개하거나 공개를 앞둔 정치 드라마와 영화는 4~5편에 이른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유력 정치인과 그를 돕는 전략가의 이야기부터 얼떨결에 정치에 뛰어든 전직 스포츠 스타가 기성 정치계에 날리는 통쾌한 한 방, 퇴임을 앞두고 레임덕에 시달리는 갱년기 대통령까지 소재와 캐릭터가 각양각색이다. 정통 역사극을 통해 정치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도도 빠지지 않는다. 정치극 풍년이다.
#“정치판은 소재 노다지” 현실 풍자극
풍자는 정치극에서 빠질 수 없는 흥행 요소로 꼽힌다. 현실을 풍자하거나 실존 정치인이나 정당의 행태를 꼬집는 풍자야말로 정치 소재의 드라마나 영화가 오랫동안 맥을 이은 힘이다.
배우 차인표가 주연한 ‘청와대 사람들’은 오랜만에 나오는 정치 시트콤이다. 주인공은 임기 3년 차를 보내고 있는 중년의 대통령. 호르몬 문제로 갱년기에 접어든 대통령에게 레임덕까지 겹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총 10부작으로 제작돼 모든 촬영을 마치고 내년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OTT) 공개를 준비하고 있다.
‘청와대 사람들’은 그동안 정치 소재 드라마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차별화를 노린다. 갱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퇴임 이후 가족들에게 구박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정권 재창출에 실패하면 전임 대통령들처럼 감옥에 갈 수 있다는 두려움도 가진 인물이다. 한마디로 권력과 남성 호르몬의 ‘누수’를 동시에 겪는 중이다.
제작진은 국가 최고 권력자라는 타이틀을 벗기면 한낱 중년 남성에 불과한 대통령의 이야기로 승부수를 띄운다. 특히 정치 풍자 경험이 풍부한 ‘SNL코리아’ 제작진이 극본과 제작 등을 맡아 기대를 높이고 있다. 제작진은 “정치판은 콘텐츠 소재 찾기의 노다지”라고 밝히면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정치극을 예고했다.
사실 정치 이야기는 냉철하게 분석할 때보다 유쾌하게 풍자할 때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대선 시류에 편승하면서도 블랙코미디로 차별화를 노린 드라마가 활발히 제작되는 이유다. 11월 12일 OTT 웨이브가 12일 공개한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도 그 흐름을 따른다.
배우 김성령이 주연한 이 드라마는 여야, 좌우 상관없이 기성 정치판 모두를 비판 대상에 올린다. 정치에도 새로운 시각과 사람이 필요하지 않냐는 제언이다. 주인공은 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 출신의 유명 인사. 가는 곳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는 정권 말기 소위 ‘땜빵’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임명된다.
꽃길이 열릴 것 같지만 현실은 지옥이다. 임명 직후 정치평론가인 남편이 의문의 세력에 납치당하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청와대까지 쳐들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리 지키기에 목숨을 건 정치인들 틈에서 정치 문외한인 신임 문체부 장관이 어떻게 살아남는지 보는 재미가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누가 왕이 될 상인가’ 정통 정치극
정통 정치극도 빠질 수 없다. 코미디를 걷어내고 묵직하게 정공법을 택한 영화와 드라마가 뒤를 잇는다. 정치극에 높은 선호를 보이는 중장년층 관객과 시청자를 공략하는 작품들이다.
12월 중순 개봉하는 영화 ‘킹메이커’는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과 뒤에서 그를 돕는 선거 전략가의 치열한 두뇌 싸움을 그린다. 배우 설경구가 세상을 바꾸려고 선거에 도전하지만 4번이나 낙선한 정치인 역을 맡았고, 그를 도와 선거의 판세를 뒤집는 전략가 역은 이선균이 연기한다. 극의 배경은 1970년대. 실제로 정치에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시기이자, 정치를 둘러싼 믿기 어려운 일들도 벌어진 때다. 영화는 혼돈의 시기 열세였던 정치인이 어떻게 대통령 후보까지 오르는지 막전막후를 담는다.
정통 정치극에 임하는 배우들에겐 적잖은 부담이 따른다. 유력 대선주자 역할을 맡은 설경구는 특히 연설하는 장면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연설 성격상 선동적인 면이 필요하지만 어떻게 톤을 잡아야 할지 난감했다. 최근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12월 11일 시작하는 KBS 1TV 대하사극 ‘태종 이방원’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역사를 다시 한 번 다루면서 ‘진정한 리더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작품이다. 역사극이지만 현실 정치와 맞물려 해석될 여지가 많은 드라마이기도 하다. 고려라는 구질서를 무너트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이방원의 모습에 집중한다. 대선의 열기가 달아오르는 시기를 겨냥해 리더의 가치를 역사 속 인물을 통해 보여주겠다는 시도이다.
이방원 역할은 배우 주상욱이 맡았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서 높은 이상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주상욱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이방원을 보여 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부친이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역할은 배우 김영철이 맡았다. ‘태조 왕건’부터 ‘대왕세종’, ‘장영실’ 등 KBS 대하사극에서 역사 속 인물을 자주 연기한 김영철은 이번 ‘태종 이방원’을 통해 다시 한 번 진가를 드러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 밖에도 정치인을 내세운 정치 소재 작품들은 활발히 제작되고 있다. 라미란 주연의 ‘정직한 후보2’도 내년 개봉을 준비 중이다. 서울시장을 노리는 3선 국회의원이 어느 날 갑자기 거짓말을 못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정직한 후보’ 1편은 지난해 개봉해 153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흥행 바통을 잇기 위해 주연 배우들은 물론 감독, 제작진까지 다시 뭉쳐 최근 후속편 촬영을 마쳤다. 2편은 다시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전직 정치인의 도전기를 그린다.
배우 김희애와 문소리가 주연한 넷플릭스 드라마 ‘퀸메이커’는 서울시장에 도전하는 인권변호사와 그를 시장으로 만들려는 이미지 메이킹 전문가가 뛰어든 선거판 이야기로 눈길을 끈다. 여성 정치인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점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이호연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