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몇몇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데, 고3 아이를 둔 부모가 심정을 토로한다. 아이가 삼수를 하는 바람에 고3을 두 번 세 번 해보니 사는 게 말이 아니란다. 아이도 불쌍하고 부모도 불쌍하다고.
그 와중에 변협회장을 했던 이진강 변호사가 자기 경험을 이야기한다. 아이가 고3이 되어 처음으로 절을 찾았단다. 그 전 같으면 ‘기복 신앙’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욕하고 돌아섰을 텐데 아이가 고3이 되니까 아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럼으로써 초조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너무나 다행이었다고.
절에 가서 아이를 위해 향불을 피우고 절을 하는데 차분해지더란다. 아이에 대한 사랑도 새록새록 성장하고. 왜 아내가 그토록 열심히 기도를 해왔는지 알겠더란다. 뿌듯해져서 집에 돌아와서는 아내에게 자랑을 했단다. 여보, 내가 오늘 우리 아이 좋은 대학에 보내달라고 절에 가서 절을 했어요!
그런데 아내의 반응이 묘했다. “우리 애만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록 빌었나요?”
아내의 반응이 쉽게 납득되지 않아 되물었단다. “응? 응! 그랬지요.”
아내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우리 애만 말고, 모든 애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비세요.”
그는 논리적인 설득을 업(業)으로 삼는 변호사였다. 그것은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기만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남들이 가면 우리 애는 못 가는 건데요.”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편안하게 말하더란다. “다 들어갈 자리가 있어요.”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 모든 아이들이 원하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다, 들어갈 자리가 있어요, 얼마나 말이 안 되는 말인가. 그러나 또 얼마나 멋진 말인가! 나는 보지도 못한 그 여인에게 중요한 것을 배웠다. 그 여인을 만나고 싶었다. 한 고비를 넘어야 하는 아이를 위해 빌고 또 빌며, 같은 고비를 넘고 있는 다른 아이들까지 사랑하게 된, 큰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여인을. 그런 선량한 마음 곁에서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마련 아닌가.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원하는 것은 좋은 교육을 받아 좋을 직업을 갖는 것일 것이다. 자녀들에 대한 그런 소망은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비난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고 좋은 직업을 가졌더라도 스스로 평화를 일굴 능력이 없다면, 좋은 직업과 좋은 교육이라는 게 그 사람을 자만하게 만들고, 더욱 경쟁적이고 더욱 이기적으로만 만들 뿐이다.
아이들에게 경쟁하지 말라고, 경쟁을 포기하라고 말할 순 없다, 이 나라에서. 그러나 큰어머니의 마음을 가진 그 여인에게서 배운 법을 실천하고 싶다. 치열한 경쟁을 사랑과 자비의 그릇에 담는 법, 논리적인 모순을 생의 한가운데서 융화하는 법!
수원대 교수 이주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