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7일 방송되는 KBS1 '다큐온'은 '길 위에서 길을 묻다' 편으로 꾸며진다.
2022년 임인년 검은 호랑이의 해가 밝았다. 개인의 삶은 물론 세계 경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와 고통을 가져다준 팬데믹 상황은 올해도 좀처럼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인의 마음은 더 조급해지고 삶은 더 각박해지는 시절. 각자의 마음의 짐을 안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묻기 위해 길 위에선 사람들이 있다.
'길 위에서 길을 묻다'에서는 423km를 맨몸으로 길 위에서 먹고 자며 삼보사찰로 치유의 길을 떠난 이들의 특별한 여정을 담았다.
불교에는 불(佛), 법(法), 승(僧) 세 가지 보물이 있다. 진리를 깨닫고 중생을 인도하는 부처가 불보, 부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이 법보,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스님이 승보이다.
50여 명의 스님과 50여 명의 일반 참가자가 불교의 세 가지 보물인 불(佛), 법(法), 승(僧)을 대표하는 삼보사찰 순례를 떠난다. 산티아고 길 못지않은 아름다운 우리의 길 지난 가을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를 시작으로 해인사를 거쳐 통도사에 이르기까지 423km, 1077리의 길을 걸으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는다.
많은 사람이 움직이는 만큼 백신 2차 접종까지 마쳐야 참가할 수 있고 순례 기간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20여 일간 하루 25킬로미터씩 걷기 수행을 한다. 걷다가 노천에서 허기를 채우고 송광사, 화엄사, 표충사, 통도사 등의 템플스테이에서 1인 1실 천막살이를 하며 고행을 견디는 시간.
걷는 동안은 말없이 오롯이 자연과 대화하며 자신을 성찰하는 묵언수행을 한다.
승보종찰 송광사에서 시작해 법보종찰 해인사를 거쳐, 불보종찰 통도사까지 423km에 이르는 대장정 속에는 가파르고 힘든 여덟 고개가 있다. 시암재 오도재 사자평 등 1000미터를 넘나드는 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녹록지 않다.
사람들은 매일 새벽 3시 이슬을 맞고 달빛을 벗 삼아 험준한 길을 묵묵히 걸으며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찾는다. 굽이치는 산자락은 인생의 오르막길, 내리막길과 다르지 않다.
7년 전 김정숙 씨(61)도 암 진단을 받고 삶의 위기를 겪었다. 9남매에 가난한 집에 시집 와 아등바등 살다 보니 건강을 놓쳤다. 그 후 산티아고, 네팔 등 수 만 킬로 걷기에 도전하며 건강을 회복했다.
인생의 위기가 곧 수행이었다. 마라토너 스님으로 알려진 진오스님은 25세 군 생활을 할 때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하고 미래가 막막할 때 남은 생은 다른 사람을 돕는 데 쓰기로 결심했다.
베트남, 캄보디아, 미국까지 10년째 달리는 스님은 베트남에만 화장실 70여 개를 짓고 구미에 이주노동자센터를 만들어 다문화 가족을 돕고 있다. 이런 활동이 염주처럼 계속 이어지길 바라면서 천릿길 걷기에 도전했다.
김호준(32)는 호산스님과의 인연으로 스노보드 선수가 됐고 2010년 벤쿠버 올림픽에 출전한 국가대표선수. 설원을 누비며 단련된 스포츠맨인데 가장 싫어하는 걷기에 도전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왜 걷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의 답은 제각각이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소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흔들림 없이 살아갈 마음의 법도를 찾기 위해서다.
삼보사찰 천리 순례길. 중간 지점 즈음 사계절 걷기 좋은 길을 만난다. 해인사 소리길 626m 다. 힘든 고비를 견뎌온 사람들에게 말문을 닫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는 길.
부처의 가르침과 2000여 년의 불교 역사가 담긴 팔만대장경은 불법의 상징이다. 순례단은 불법을 길 위에서 몸소 겪으며 마음에 법이 생기기 시작한다. 1인용 텐트 안에 최소한의 살림살이만으로 족한 생활.
정숙 씨는 소욕지족의 홀가분함을 깨닫는다. 작게 가져서 모자라지 않다고 느끼는 건 많이 가져서 생기는 괴로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호준은 발에 물집이 차오르고 살이 뜯기는데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이 물집 보다 더 큰 고통이 삶에 찾아와도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리라는 다짐, 마음의 법 하나가 생겼다. 항명스님은 구멍 난 신발을 신고 걸음을 재촉한다.
가던 길을 그만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또한 하나의 수행이라고 말한다. 많은 참가자들은 어두운 새벽 순례를 하면서 어둠이 거치면 해가 뜬다는 이치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걸 서서히 알게 되는 시간이다.
삼보사찰 108 천리 순례길 마지막 고개인 영남알프스 사자평 억새밭을 오른다. 900m가 넘는 고개를 오르며 깨달음을 향한 가파른 숨을 내쉰다. 억새를 스치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살아있는 자연의 울림을 느끼는 사람들. 실로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운 만남이 아닌가.
진오스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 안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있다. 더 빨리, 더 편하게 문명의 이기만 쫓다가 놓친 자연의 이치를 길 위에서 다시금 깨닫게 한다.
걸을수록 발뿐만 아니라 몸의 약한 부분이 돌아가며 신호를 보낸다는 걸 알게 된 백금선 씨. 자기 내면을 더 깊이 알게 됐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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