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는 기관총 개미는 소총 들고 투자
‘차별화된 서비스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요즘 여의도 증권가의 가장 큰 화제와 고민거리는 12명의 국내 주요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들이 동시에 법정에 서게 된 사건이다. 해당 증권사들이 ELW(주가연계워런트) 관련 고액 초단타 매매자들인 ‘스캘퍼’들(Scalpers)에게 더 빨리 거래가 성사될 수 있도록 전용선을 제공해 전용선을 이용하지 못하는 일반 투자자들에게 상대적으로 피해를 준 게 ‘특혜’인지 여부가 사건의 핵심 쟁점이다.
증권사 측은 수익 기여도가 높은 고객에게 차별화된 서비스를 하는 것은 당연하며, 업계의 오랜 관례라는 입장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미국 등 선진국에서도 핵심 고객에게 전용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일반적”이라며 “회사가 고객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를 차별화한 것이 왜 위법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라고 말했다.
반면 기소를 결정한 검찰은 10분의 1초 사이에도 투자 성과가 크게 엇갈릴 수 있는 ELW 시장에서 증권사들이 스캘퍼에게만 일반 투자자들이 거쳐야 할 내부 방화벽을 건너뛸 수 있도록 해준 게 문제라는 논리다. 특정 투자자에게만 거래 속도를 다르게 해 수익 확률을 높인 것은 ‘공적 기회에 대한 동등한 접근조건’이 아니라는 뜻이다.
부정거래행위를 금지한 자본시장법 178조 1항 1조는 ‘부정한 수단, 계획 또는 기교를 사용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금융투자업자의 신의성실의무를 규정한 동법 37조 2항은 ‘정당한 사유 없이 투자자의 이익을 해하면서 자기가 이익을 얻거나 제삼자가 이익을 얻도록 해서는 아니 된다’고 돼 있다. 이해상충을 규정한 동법 44조는 ‘투자자 간 이해상충이 발생할 때는 이를 미리 해당 투자자에게 알리거나 해소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매매, 그밖의 거래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
전용선을 제공한 게 부정한 수단인지, 전용선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투자자의 이익을 침해했는지, 전용선 제공 사실을 다른 투자자에게 미리 알렸는지가 이번 사건의 쟁점이다. 최종 판단은 법원의 몫이지만, 양측 입장 차가 워낙 첨예하고 증권사 CEO들의 자리와 업계 CEO를 무더기 기소한 검찰의 자존심이 걸린 만큼 3심까지 갈 확률이 높아 보인다. 수년은 걸릴 소송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번 소송은 ELW 거래에서 전용선 제공의 위법성 여부를 넘어 날로 차별화되고 있는 증권사 서비스의 적정 수준이 어딘지에 대한 논란을 촉발시킬 것으로 보인다. 요즘 각 증권사들은 VIP VVIP 등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 이상의 자산을 맡기는 초고액자산가를 대상으로 한 영업 경쟁이 치열하다.
은행에서도 고액자산가들에게 프라이빗뱅킹(PB) 서비스를 해주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원금이 보장되는 상품이 대부분인 은행과 증권은 다르다. 증권사는 원금 손실이 가능한 투자와 관련된 서비스인 만큼 차별화의 결과는 수익의 차별, 때로는 이익과 손실이라는 엇갈린 결과를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내 대형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 투자와 관련한 보고서를 고액자산가에게 먼저 제공한다면 어떨까. 보고서의 질을 따져봐야겠지만, 만약 양질의 보고서여서 정보를 먼저 취득한 고액 자산가가 선제적으로 투자해 수익을 올린다면, 뒤늦게 보고서를 접해 더 늦게 투자에 나선 투자자는 상대적으로 손실을 볼 수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대놓고 고액자산가나 법인들에게 보고서를 먼저 제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을 위한 별도의 자료를 만드는 경우도 있고, 별도의 미팅을 통해 보고서에 담길 내용을 미리 언급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고액 자산가가 개인적으로 증권사 내 전문가들로부터 조언을 요구했을 때 거부하기도 힘들다”고 털어놨다.
현재 국내 증권사의 수익구조를 보면 아직 부자 관련 수익이 일반 소액투자자 관련 수익을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부자 관련 수익이 더 늘어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등 이른바 부자들을 위한 상품이 앞으로 증권사의 핵심 수익이 될 전망이기 때문이다. 헤지펀드를 예를 들면, 수수료는 일반 금융상품 대비 훨씬 높고 초과수익의 약 20%를 성공보수로 받을 수 있다. 또 헤지펀드 운용과 관련된 각종 조사 및 매매 서비스를 대신 해주는 프라임브로커(Prime Broker)라는 역할이 있는데, 증권사의 몫이다.
미국의 경우 골드만삭스 제이피모건 등 대형 투자은행 수익의 40%가량이 바로 프라임브로커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나머지 60% 가운데도 증권사 자체 자산을 굴리는 데서 나오는 수익이 대부분이다. 투자 관련 보고서도 돈을 내지 않으면 볼 수 없게끔 하고 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소액투자자들이 평등한 대우를 요구할 처지가 못 된다.
아직 국내 증권사들은 이 같은 수익구조가 아니기에 대놓고 소액투자자들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요즘 나오는 상품들을 보면 차별할 생각이 뚜렷해 보인다. 소액으로 투자가 가능한 공모형 펀드의 경우, 정부의 각종 규제로 판매비용이 높아지고 판매보수는 낮아져 판매를 외면하고 있다. 대신 수천만 원 또는 수억 원의 가입한도를 가진 랩어카운트나 신탁형 상품을 앞 다퉈 내놓고 있다.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투자설명회에는 투자자문사 대표나 증권사 고위임원이 참석하는 반면 일반 투자자 투자설명회에는 실무자들이 참석한다. 실무자라고 실력이 못하라는 법은 없지만, 아무래도 시장 영향력이 큰 고위급 인사가 강사로 나선 설명회의 정보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을 가능성이 크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자문사 대표의 경우 직접 투자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위치다. 따라서 설명회에서 어떤 업종, 어떤 종목에 대해 유망하다는 언급을 한다는 것은 투자판단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면서 “이 때문에 금융당국에서 개별종목 언급을 자제하라고 권하고 있지만, 언론 참여까지 배제시키고 고객과 자문사 관계자, 그리고 증권사만 모인 자리에서 개별종목에 대한 정보가 교류되는 것을 막을 길은 사실상 없다”고 말했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마치 한 가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양립할 수 없는’(Incompatible) 요소가 존재한다. 민주주의가 모든 구성원들에게 동등한 기회와 자격을 주는 게 원칙이라면, 자본주의는 자본의 크기에 따라 기회와 자격을 주는 게 원칙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본주의에서도 공적 기회에 대한 접근에는 동등한 조건이 보장돼야 한다. 이번 ELW 관련 소송 결과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이해상충을 얼마나 합리적인 선에서 조율할지 중요한 기준이 될 전망이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