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고객’ 텃밭 욕심내면 ‘독’ 깬다
그렇다면 한국의 주요 수출국가인 미국의 컴퓨터 시장에서도 삼성의 브랜드 가치가 우리의 기대만큼이나 드높을까. 정답은 ‘아니오’다. 삼성 브랜드의 모니터는 미국 소비자들로부터 높은 신뢰도를 얻고 있지만 컴퓨터의 핵심구성요소인 본체에는 아직 진출을 못하고 있다.
미국 소비자전문지 <컨슈머 리포트>(Consumer Report) 6월호는 컴퓨터 본체(데스크탑과 노트북)와 모니터에 대한 신뢰도 순위를 발표했다. <컨슈머 리포트>는 미국 소비자연맹이 발행하는 월간지로 소비자 선호도, 가격, 성능 등을 모두 고려한 결과를 발표해 미국 소비자들의 신뢰도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인정받고 있다. 국내 기업들도 <컨슈머 리포트>에서 호평을 받으면 이를 국내 언론에 앞다퉈 홍보할 정도로 신뢰도 높은 조사·연구결과를 자랑하고 있다.
이 잡지 6월호에 실린 컴퓨터 본체 부문 평가에서 델이나 HP, 컴팩, 소니 같은 다국적 기업들이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데스크탑 부문에선 ‘1위 HP, 2위 컴팩, 3위 소니, 4위 델’의 순서로 평가됐으며 노트북 부문에선 ‘1위 HP, 2위 소니’, 그리고 델과 컴팩 등이 상위권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반면 국내기업은 10위권 안에 명함조차 내밀지 못했다.
IT코리아 위상에 걸맞지 않게 미국 소비자들은 한국 기업 브랜드 컴퓨터에 대한 신뢰도를 거의 갖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홍보실 관계자는 “미국 시장에 삼성 상표를 붙이고 있는 컴퓨터 본체는 거의 없다”고 밝힌다. 비교대상이 안 되는 만큼 순위에도 오르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삼성은 델이나 HP, IBM 같은 다국적 기업에 컴퓨터 본체 핵심부품인 D램, S램 등을 수출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D램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위 자리를 지킨다는 사실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지난 4월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부문 총괄사장은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전자산업협회(EIA)의 기술혁신 리더상을 수상했다. 당시 황 사장은 “델 컴퓨터 등 미국기업이 삼성전자의 반도체 핵심부품을 이용해 전 세계 IT산업의 주도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상을 받은 것 같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IT 강자로 인정받은 삼성이 자사 브랜드로 컴퓨터 본체를 만들어 미국시장에 뛰어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성전자측은 “델 같은 큰 회사에 반도체를 수출해 큰 이익을 남기는 입장에서 직접 본체를 만들어 삼성 상표를 달고 미국시장에 진출하면 델과 경쟁자가 된다”고 밝혔다. 델을 주 공급업체인 동시에 경쟁자로 삼는 것은 이해타산에 맞지 않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모니터 부문으로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컨슈머 리포트> 6월호에 실린 17인치 LCD 모니터 부문 신뢰도 순위에서 델이 1위를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삼성의 싱크마스터가 2위에 올랐다. 모니터만큼은 삼성 자체 브랜드로 미국에서 호평을 얻고 있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델 컴퓨터에 본체 부품뿐만 아니라 LCD모니터의 핵심부품인 LCD패널을 수출하고 있다. 모니터 시장에서 삼성은 델과 경쟁을 하면서도 델에 공급업체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측은 “본체 시장과 모니터 시장은 규모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고 밝혔다. 모니터에 비해 컴퓨터 본체 시장 진입이 훨씬 어렵다는 설명이다. 삼성전자측은 “모니터는 이미 전부터 삼성이 세계무대를 석권해왔지만 지금 델이 석권하는 본체 시장에 삼성이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것이 사업적으로 옳은가 생각해봐야한다”고 밝혔다.
컴퓨터 본체 시장이 중국산 저가 컴퓨터의 공세 등으로 경쟁이 치열한데다 수익성도 높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국내 벤처기업 1호로 불리는 삼보컴퓨터가 부도를 내는 충격적인 사태까지 벌어졌다. 개인용 PC를 처음 내놓은 데스크탑 컴퓨터의 대명사인 IBM도 데스크탑 컴퓨터 부문을 중국 회사에 팔고 철수했다.
삼성 컴퓨터도 예년만큼의 실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는 데스크탑과 노트북 제조 라인을 중국 등지에 옮겨서 국내시장용 컴퓨터를 생산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내시장에 삼성 브랜드를 달고 판매되는 모든 컴퓨터 본체 안에는 삼성이 세계적으로 기술력을 자랑하는 핵심부품이 탑재돼 있는 것일까. 삼성전자측은 “대부분의 국내시장용 삼성 컴퓨터가 삼성이 만든 반도체 부품 중심으로 조립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소수 있다”고 밝혔다. 국내 시판되는 삼성 컴퓨터 중엔 삼성의 하청업체가 만든 부품으로 구성된 본체도 일부 있다는 것이다. 즉, 삼성 로고가 박힌 컴퓨터를 구입한다고 해서 삼성 반도체를 썼다고 100% 보장할 수는 없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