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43>
▲ 토시는 더위와 추위를 막으려고 팔에 끼는 의복으로 고려 중엽 이후 애용돼왔다. 사진은 전통의 멋을 잘 살려 디자인한 양털토시. 사진제공=오리미한복 |
토시는 고려 중엽에서 시작하여 조선 전기의 출토품에서도 나타난다. 조선 후기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조상들이 두루 애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갑오개혁(1894) 이후 서구 문물인 셔츠, 양말, 장갑 등이 들어오면서 조금씩 밀려났다. 하지만 1920년대까지만 해도 토시는 널리 애용됐다.
1926년 2월 13일 설날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사회면에는 근화여학교 학생들의 ‘불우이웃돕기’를 칭찬하는 기사가 실렸다. 사라진 단어 일부와 띄어쓰기를 지금 어법에 맞게 바꾸어 소개하면 이렇다.
“헐벗고 배주린 빈민 동포들은 모진 목슴을 붓들고 깃븐 음력설을 슬프게 밧구게 되는 것은 일반이 짐작하는 바 어니와 시내 안국동(安國洞) 삼십칠번디에 잇는 근화녀학교(槿花女學校)에서는 그가튼 헐벗고 굼주린 빈민 동포들에게 따듯한 밥 한술이나마 가치 노느고 깔깔하고 매운 바람에 시치는 설산한 몸을 가리워서 환세(換歲)의 깃븜을 가치 노느기 위하야 동교직원 이하 삼백여명 학생들로부터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긔우리고 쓰고 남음이 업는 학비에서 얼마식을 쪼개여 현금팔십륙원과 의복 삼십여개를 모하 극빈자에게 난호아주기를 본사에 의뢰하엿는데 그 물품 중에는 동교녀 학생들이 디방으로부터 올나온 녀학생들이 만흐니만큼 출품한 의복도 대부분이 여자의 것으로 저고리 수물 치마 여섯 바지와 토시 열이엿고”
▲ 양털토시와 귀여운 자수가 놓인 누빔비단토시, 그리고 어린이용 색동토시. 사진제공=오리미한복 |
토시는 겨울용과 여름용으로 구분된다. 겨울용은 비단, 무명, 교직 등을 겹으로 만들거나, 솜을 두기도 하며, 동물의 털가죽을 안에 덧대어 만들었다. 여름용은 등(藤)나무나 대나무, 말총을 사용해서 통풍이 잘 되도록 엮었다. 옷소매와 팔목의 사이가 떠서 시원한 바람이 통할 수 있다. 토시 자체가 수공예품이어서 실용과 장식을 겸했다. 주로 남자들의 여름 기호물(嗜好物)이었다. 손바닥 크기의 깜찍한 어린이용 겹토시, 갓난아기의 솜토시, 어린이용 색동토시, 수를 놓은 자수토시 등도 있었다.
토시는 농사를 짓는데도 사용했다. 벼가 많이 자라 억센 잎에 손목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팔목에 끼었다. 논을 맬 때 옷소매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는 기능도 갖췄다. 또 옷감이 귀했던 시절에는 소매 끝이 닳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도 했을 것이다.
토시는 모양과 재료에 따라 털토시, 누비토시, 등(藤)토시, 마제굽토시로 불린다. 마제굽토시는 말발굽처럼 생겼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전통 토시는 사라졌지만 근대화와 함께, 혹은 유행에 따라 새로운 토시가 등장했다. 야구 감독들이 더위를 쫓기 위해 토시를 사용한다. 특히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골프용, 운전용, 등산용으로 사용된다. 실용적인 토시도 있지만 패션 토시가 인기를 끌고 있다. 겨울철에는 팔이 짧은 코트나 아예 없는 겉옷이 유행하면서 팔 보온을 위해 손 토시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전통의 멋과 선과 감각을 살린 토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해외 유명 브랜드 용품이 넘쳐난다. 비단에 매화나 국화가 정성껏 수놓아진 토시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