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본대로라면 다음은 미국 추방?
▲ BBK 사건 ‘키맨’으로 불리 는 김경준 씨와 에리카 김 남매. 지난 3월 에리카 김 입국 당시 정부와의 사전밀약설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
그런데 <일요신문> 확인결과 김 씨가 7월 14일 외국인 수형자 전담 교정시설인 천안교도소로 이감된 것으로 드러났다. 김 씨의 이감은 그의 누나 에리카 김이 입국한 이후 이뤄진 일이라는 점에서 한동안 정치권에서 회자됐던 정부와의 밀약설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일각에서는 그가 현 정권이 끝나기 전 미국으로 추방될 것이라는 얘기도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이번 이감은 미국 이송을 위한 단계를 밟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이명박 정부 출범 나흘 전인 2008년 2월 21일 BBK 특별검사팀은 BBK사건에 대해 ‘검은머리 외국인’에게 대한민국이 우롱당한 사건이라 규정했다. 김 씨를 지칭한 특검팀의 ‘검은머리 외국인’ 발언에 재미교포 사회는 교포 전체를 비하하는 뉘앙스를 풍긴다며 발끈했다.
하지만 김 씨는 미국 시민권자다. 비록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긴 하지만 김 씨가 엄연한 미국인이라는 것은 과거 검찰 조사과정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그 스스로도 인정한 바다.
이 때문일까. 확인결과 서울남부교도소에서 수감 중이던 김 씨는 7월 14일 외국인 전담 교정시설인 천안교도소로 이감됐다. 주목할 점은 김 씨가 지난해 4월과 올 3월에도 형 집행순서 변경신청을 했다가 불허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자유형 집행과 벌금형 집행 순서를 변경하고 미국 교정시설로 이송을 요청한 것이었다. 두 차례 불허 처분을 받은 김 씨는 올 5월 26일 또다시 형 집행변경을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대신 7월 14일 천안교도소로 이감됐다.
따지고 보면 미국 국적인 김 씨가 천안교도소에 수감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김 씨의 이감이 추후 미국 이송을 위한 전초단계를 밟고 있는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점이다. 이미 김 씨가 몇 차례 미국 교정시설 이송을 위한 변경신청을 한 바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볼 때 더욱 그렇다. 특히 그간 김 씨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을 종합해보면 이건 왠지 미리 정해진 수순대로 흘러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모든 의혹의 중심에는 그의 누나 에리카 김이 자리잡고 있다. 지난 2월 에리카 김이 깜짝 입국했을 당시 불거졌던 현 정부와 그녀 간의 ‘밀약’ 의혹이 그 배경이다. 당시 에리카 김을 포함한 BBK 키맨들의 잇따른 입국은 기획입국 의혹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특히 에리카 김의 입국과 관련해서는 김재수 LA 전 총영사가 현 정부와 사전 조율을 담당했다는 얘기까지 나돌기도 했다.
에리카 김 기획입국설의 본질은 정부와의 빅딜설이다. 그리고 핵심은 동생 김 씨의 미국 송환이었다. 즉 검찰에 자진출두한 그녀가 ‘이 대통령이 BBK 실소유주’라는 기존 주장을 번복하고 검찰이 원하는 진술을 하면 국내에서 수감중인 동생의 안위를 보장받을 뿐 아니라 본인도 혐의를 일정부분 탕감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 빅딜설의 골자였다.
사전협상의 핵심은 당연히 김 씨의 미국 송환일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는데, 실제로 에리카 김의 입국 후 정치권 주변에선 김 씨가 곧 미국으로 이송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공교롭게도 에리카 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대로였다. 그녀는 이틀간의 검찰조사에서 “BBK의 실소유주가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라고 주장한 것은 거짓말이었다”고 진술을 번복했다.
이에 검찰은 그녀의 공직선거법위반 및 주가조작 혐의에 대해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공소권 없음’ 처분을 했고, 약 50억 원을 횡령했음에도 가담 정도가 가볍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이렇게 한 달 동안 ‘맹활약’ 한 그녀는 혐의의 상당부분을 내려놓고 유유히 출국했다.
에리카 김의 진술번복으로 현 정권은 안도의 숨을 내쉬는 듯했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가시지 않았다. 에리카 김의 뜬금없는 귀국과 진술번복은 오히려 정부와의 사전밀약 의혹을 눈덩이처럼 키웠다. 이런 배경하에서 볼 때 김 씨의 이번 이감은 그냥 지나칠 문제는 아니다. 특히 그가 이미 두 차례나 미국 교정시설 이송을 요청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계획대로 슬슬 움직이는 냄새를 지울 수 없는 형국이다.
우선 ‘김경준=미국인’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법이 있다. 바로 ‘국제수형자이송법’이다. 이 법은 외국에서 형집행 중인 국민의 국내 이송과 국내에서 형집행 중인 외국인의 국외 이송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2007년 제정된 이 법은 당초 법무부 장관 소속 위원회가 수형자가 원하면 이송요건 충족 여부와 필요성 등을 심사토록 했지만 2009년 3월 절차 없이 법무부 장관의 결정만으로 해외 국적자의 국외 이송이 가능토록 개정됐다.
이 법에 따르면 미국 시민권자인 김 씨는 미국 송환이 가능하다. 이에 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국회 법제사법위에서 김 씨의 케이스를 거론하며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 당시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씨를 염두에 둔 법 개정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3월 2일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김 씨를 추방할 용의가 있느냐”는 민주당 김춘진 의원의 질의에 “현재 복역 중이다. 그럴 의사가 없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이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김 씨가 미국으로 추방될 것이라는 관측은 끊이지 않았다.
도곡동 땅-다스-BBK와 이 대통령의 연관 의혹은 정권 차원에서 최고의 골치덩어리일 뿐 아니라 정권이 바뀐 후에도 영원히 이 대통령을 따라다니며 괴롭힐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현 정권으로서는 언제든지 뇌관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김 씨를 미국으로 아예 추방하는 것이 최선책일 수도 있다. 이는 정부와 에리카 김 남매 간의 이른바 ‘누이 좋고 매부 좋고’식의 밀약설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 씨의 외국인 교도소 이감은 그가 ‘검은머리 미국인’임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기에 충분하다. 또 개정된 ‘국제수형자이송법’은 미국인인 김 씨를 본국으로 ‘자연스럽게’ 추방하는 역할을 하는 법적 근거가 된다. 이쯤되면 모든 것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분위기다. 미국 교도소로 이감될 경우 모든 생활기반을 미국에 두고 있는 김 씨로서도 더 없이 반가운 일이다. 그가 미국 법에 따라 조기 가석방될 가능성도 열려있기 때문이다.
김 씨의 미국 송환 가능성은 오래전부터 제기된 바 있다. 실제로 박영선 의원은 4월 13일 김 씨가 자신의 변호사에게 보낸 자필편지가 존재한다고 폭로한 바 있다. 현직 검사가 ‘수감생활을 미국에서 하게 해 주겠다’고 김 씨를 회유한 구절이 적혀 있는 이 편지에는 김 씨가 “검찰이 미국송환을 추진하고 있어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증언에 나섬으로써 송환에 지장이 생길지 모른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날 박지원 의원은 이귀남 장관을 상대로 한 질의에서 “에리카 김과 검찰 권력이 이미 거래를 해서 이 대통령 임기 내에 김 씨가 꼭 미국으로 갈 것으로 본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천안교도소 측은 김 씨의 이감에 대해 “김 씨는 국적상 외국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감됐다. 외국 국적을 가진 수형자는 대전교도소 등에도 수용되고 있지만 외국인을 전담으로 수용하는 천안교도소에 이감될 가능성이 좀 더 높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교도소 관계자는 “이감은 수형자가 요청한다고 해서 간단히 이뤄지는 문제가 아니다. 교정본부의 판단에 따라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김 씨의 경우 본인이 외국인 전담교도소로 이감을 요청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