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원한다면 ‘문’ 열어달라”
▲ 여름과 씨름 중 일본 고베 구장을 찾아가 부상 회복 후 1군 복귀를 위해 담금질 중인 박찬호를 만났다. 그는 미국 생활을 정리할 때 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면 일본을 택하지 않았을 거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홍순국 사진전문기자 |
그렇게 해서 일본 출장 중에 박찬호를 찾아 나섰다. 오릭스 버팔로스 2군에 속해 있는 박찬호를 만나기 위해선 오사카에서 JR선을 타고 산노미야에서 내린 후 소고운도코엔으로 향하는 지하철로 갈아타야 한다. 소고운도코엔역에서 내리자 오릭스 버팔로스의 고베 구장인 효토모토 필드 고베가 눈에 띈다. 그 운동장을 옆에 두고 20여 분을 걸어가니 오릭스 2군 선수들이 훈련하는 야구장이 나타난다. 섭씨 36℃가 넘는 고베의 여름. 그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뛰고 구르고 던지고 때리는 선수들의 모습에 절로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여전히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박찬호는 오릭스에서 코치 연수중인 김상엽 코치와 함께 훈련 준비 중이었다. 그동안 메이저리그 팀에서 활동 중인 박찬호를 현장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일본에서, 그것도 2군에서 뛰고 있는 박찬호의 모습은 생경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난 번 햄스트링 부상 후 열심히 재활에 매달렸고, 그 결과 8월 6일 2군 경기에 등판하는 등 1군을 향한 복귀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훈련을 마치고 마사지를 받은 후 늦은 점심식사를 한 박찬호는 퇴근 전에야 기자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일본에서 만나니까 기분이 묘하다. 지난 시즌 뉴욕 메츠 스타디움에서 피츠버그 유니폼을 입고 기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지금은 오릭스 버팔로스 유니폼을 입고 앞에 앉아 있다. 지금 몸 상태는 어떤가(박찬호는 지난 6월 28일 2군에서 1군으로 복귀, 훈련 중 달리기를 하다가 허벅지 뒤쪽 근육이 파열된 뒤 줄곧 2군에 머물렀다).
▲이제 부상당한 부위는 다 나았다. 회복이 잘된 편이다. 8월 6일, 시모노세키 원정 2군 경기에 등판하는데 그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1군으로 가는 길이 멀지 않을 것이다.
―지난 5월 30일 2군으로 내려갔다가 한 달 만에 1군으로 복귀했고, 이틀 후면 1군 선발 등판이 예정된 상태에서 부상을 당했다. 상심이 컸을 것 같다.
▲부상당하는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1군으로 올라가자마자 2시간 만에 그렇게 됐으니까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었겠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뭐가 문제였는지 생각도 해봤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다. 가장 중요한 건, 그걸 견뎌내고 극복해서 다시 1군 마운드에 오르는 일이다.
―일본 무대에 진출하면서 가장 걱정한 부분이 무엇이었나.
▲그렇게 많은 걸 걱정하진 않았다. 사람들은 색다른 환경, 언어, 쏟아지는 관심을 내가 얼마나 잘 견뎌낼지에 대해 오히려 더 걱정했지만, 난 그런 생각보다는 기대감이 더 컸다. 단 한 가지 우려한 부분이 있었다면 부상이었다. 나이가 있다 보니, 이전보다는 부상에서 회복하는 속도가 더디고, 부상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되는 건 사실이니까. 해마다 이렇게 한 번씩 다치고 나면 마음은 야구에 대한 열의가 점점 더 커지는데, 몸이 그걸 받쳐주지 못한다는 걸 새삼 절감하게 된다.
―오릭스 입단 당시 메이저리그 출신이라는 사실로 인해 엄청난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부담스럽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일본에서의 야구 생활은 모험이고 도전이고, 과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나에 대해 어떤 기대를 하고 어떤 모습이기를 원하는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팬들이 원하는 부분, 가족들이 원하는 부분이, 모두 틀리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팀을 위해 더 많이 등판하고, 더 좋은 경기를 보여줌으로써 박찬호의 야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현실은 부상을 털고 2군에서 실력 발휘해 1군으로 올라가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 그게 지금 박찬호의 현주소다.
―이 얘기는 꼭 물어보고 싶었다. 얼마 전 한 월간지와 인터뷰하면서 ‘내년에 한국에서 뛰고 싶다’는 내용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정말 그 얘기가 사실인가.
▲분명히 밝히고 싶다. 난 ‘내년에 한국에 가고 싶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왜곡된 내용이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항상 난 ‘언젠가는 한국에서 뛰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게 팬들의 입맛에 맞게끔 왜곡돼 전달된 것 같다. 그러나 그 기사로 인해 ‘박찬호의 한국행’이 내 의지가 아닌 정책적으로 내 신분이 해결돼야 가능하다는 걸 알려준 것은 맞다.
▲ 지난 4월 5일 오릭스 선발투수 박찬호가 라쿠텐과의 경기에서 3루타를 맞은 뒤 이승엽의 통역으로 포수와 대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전 미국에서 나랑 인터뷰할 때도 이 질문을 한 것으로 기억난다. 그때도 비슷한 대답을 했었다. 미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할 즈음에 한국 복귀를 고려했고, 그 절차를 알아보다가 제도적인 문제에 부딪혀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내가 한국 프로야구에 도움이 되는 존재라면 오래 전에 특별법을 만들든, 절차를 만들든, 나에게 한국 프로야구의 문을 열어줬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달라진 건 없었다. 만약 내가 언제든지 한국에서 뛸 수 있었다면, 그런 문이 열려져 있었다면, 난 일본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한국행을 선택했고, 한국에서 은퇴할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며칠 전 개인 홈페이지에 자살한 일본 투수 이라부 히데키를 언급하며 자신을 돌아본 내용이 인상적이었다(박찬호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 노력순’이라는 일기에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팀메이트였던 이라부의 죽음을 떠올린 후 ‘무엇이 그에게 절망을 안겨 준 것일까. 그의 죽음을 보며 지난 기억들을 다시 머리에 떠올려봤다. 절망, 배신, 분노, 자책, 미움, 그리고 죽음. 나 또한 이것들과 싸워왔던 시간이 있었다’라고 적었다).
▲사람들이 큰 걸 얻으면 얻을수록 허망함은 더 커진다. 큰 걸 얻었을 때 감사함이 부족하면, 작은 걸 잃어버렸을 때 더 큰 절망감을 안게 된다. 내가 무엇 때문에 ‘현실’을 누릴 수 있는지, 과연 내 노력 때문만이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평범하지 않고 불규칙한 삶일수록, 크게 올라갔다 한없이 떨어지는 롤러코스터 인생일수록, 마음을 단단히 가꿔야 한다. 특히 공인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간섭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용병이었고, 지금도 용병 신분이다. 한국 야구 선수들 중 가장 오랫동안 ‘용병’으로 산 사람으로서, 외국 생활을 하는 데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다.
▲힘들 때마다, 괴로울 때마다, 숱하게 한국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단순히 떠나는 것뿐만 아니라 야구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한국에선 김태균의 선택에 대해 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김태균이 택한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믿어줘야 한다. 그 선수가 겪은 환경을 누가 알겠나. 그건 자기밖에 모르는 일이다. 김태균 선수가 야구 못하고 폐인된 것도 아니고, 내 집으로 간 건데, 일찍 돌아왔다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가슴을 열어주지 못하고 팔을 벌려주지 못할 거라면 그냥 가만히 지켜봤으면 좋겠다.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방법을 놓고 실망감을 나타낸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한국 선수들이 외국으로 진출한다고 해서 다 박찬호 이승엽 추신수처럼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걸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한국 선수의 가치를 드높일 필요는 있다. 그러나 선수가 버티고 견디며 망가질 바에는, 차라리 일찍 결단을 내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범호도 한국으로 돌아가서 엄청나게 잘하고 있지 않은가. 내년에 김태균이 전성기 때의 모습을 보이며 한국 프로야구에 불을 지필 경우, 김태균을 비난했던 사람들도 ‘역시 김태균’이라며 박수 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일부 야구인이나 팬들은 박찬호 선수의 한국 복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영웅’은 영원한 ‘영웅’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박찬호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람 박찬호가 아닌 박찬호의 성적을 영웅시한다. 만약 박찬호가 건강하기를 바란다면, 그들한테 영웅은 건강이지 박찬호가 아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가 못 벌어서 실망한다면 그들한테는 돈이 영웅이지 박찬호가 영웅은 아니다. 진정 박찬호를 영웅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날 좋아해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내 선택이 사람들한테 회자되고 메시지가 되는 상황이라 뭔가 결정을 하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하고, 대중들이 좋아해줄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계획하고 있는가.
▲프로팀 감독과 코치만 지도자는 아니지 않나. 지금도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야구를 하든, 날 보고 꿈을 키우는 선수들한테 내 모습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면, 그 또한 지도자 아니겠나. 자꾸 유도 질문 하지 말라(웃음).
박찬호와 인터뷰 후 오사카 교세라돔에서 소프트뱅크와의 경기를 앞두고 있는 이승엽을 찾아갔다. 요즘 타격감이 살아나면서 부활 조짐을 알리고 있는 이승엽은 기자와 반갑게 해후한 후 박찬호에 대해 이런 내용을 전했다.
“찬호 형은 외부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남을 배려하고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나한테도 항상 뭔가를 챙겨주는 편이라 음식도 영양제도 많이 얻어 먹었다. 찬호 형이 부상으로 2군에서 지내는 바람에 1군 생활이 재미없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2군으로 내려갈 수는 없으니까 형이 빨리 올라오셨으면 좋겠다.”
오사카=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