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서비스에 세일 기다리며 그들도 우리처럼 ‘헉헉’
TV가 만들어낸 ‘허구의 부자상’(fake image of the wealthy)을 보고 사람들은 마치 ‘부자들은 항상 대단한 것들만 사댄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부자는 대한민국에서 5천명도 채 안 된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대부분 부자들의 소비 행태는 일반인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극소수가 워낙 ‘요란법석’을 떨며 튀다 보니까 마치 대단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어느 날 한 호텔 앞에 고급 자가용이 한 대 들어와서 섰다. 호텔 직원이 나와서 차 뒷문을 열었으나 차 주인은 나오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꿈쩍도 않고 차 뒷좌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호텔 매니저가 이 광경을 보고는 밖으로 뛰어나와 주변 직원에게 “야, 빨리 카펫 깔아”라고 소리를 쳤다. 카펫이 자가용 뒷문 앞에서부터 깔렸다. 그러고 나서야 차 주인이 천천히 내렸다. 왜 그랬을까?
이 부자가 신은 구두는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한 아주 ‘가냘픈’ 구두였다. 몇 백g이 채 안 될 정도로 솜털같이 가벼워 전혀 신은 듯한 느낌도 없는 그런 명품이었다. 이 구두는 너무나 섬세해서 그냥 호텔의 바닥을 걸으면 불과 몇 십m 가지 않아서 구두가 너덜너덜해진다고 했다. 이 구두를 신고는 오로지 카펫 위만을 걸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부자가 고급 술집에 갔다. 어느 날 호기롭게 아주 비싼 양주를 시켜 마셨다. 얼마였을까? 보통 발레타인 30년산이 1백만원 정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것보다 더 비싼 고가품들도 더러 있지만 서울 강남의 최고급 술집에서도 한 병에 1천만원을 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날 이 부자가 호기롭게 마신 술은 ‘한 잔에 3백만원’이고 ‘한 병에 8천만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어느 부자는 자동차를 아주 좋아했다. 그래서 전 세계에 단 6대 뿐인 자동차를 1995년에 수입해서 현재 소유하고 있다. 10년 전에 미화로 1천만달러를 주고 샀다. 요새 돈으로 치면 자동차 한 대에 약 1백억원을 주고 산 셈이다. 그런데 더욱 더 필자를 기가 막히게 만든 것은 이 차가 ‘미국사람이 타던 중고차’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부품이 수제로 만들어진 수제차로 알려져 있다.
국내 부자들의 이 같은 ‘휘황찬란한’ 소비 행태는 필자가 알기에도 이것 말고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실제 하늘하늘한 솜털 같은 구두를 신는 사람은 국내에 단 세 명 정도고, 8천만원짜리 양주를 마신 사람은 단 한 명이며, 1백억원짜리 자동차를 가진 이도 단 한 명 정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일반인들의 눈과 귀를 의심스럽게 하는 이 같은 ‘아주 특별한 제품’은 국내에 아무리 많아야 열 개도 채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현찰 50억원을 예금하고 있는 사람은 국내에 현재 3천8백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찰 1백억원 이상을 가지고 있는 개인도 수백 명 정도로 파악된다. 물론 강남의 어느 부자가 집안에만 현찰 80억원을 쌓아두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한 금융기관 종사자의 얘기도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부자들도 위에서 언급되었던 아주 희한한 제품들을 볼 기회가 별로 없다. 아니 대다수는 알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부자들의 소비는 어떠할까.
강남의 고급아파트 두 채와 빌딩 세 채 외에도, 금융자산이 꽤 되는 어느 ‘사모님’은 지금도 소원이 백화점에 가서 유명 상표의 수백만원짜리 화장품세트를 ‘한꺼번에’ 사보는 것이다. 이 ‘사모’의 생활비는 한 달에 4천만원 내외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일년에 생활비가 약 5억원인 셈이다. 그런데 ‘그깟’ 화장품 세트 정도에 벌벌 떤다는 것은 언뜻 생각해도 말이 안될 수밖에. 하지만 이 사모의 푸념을 옮기자면 이렇다.
“한 달 생활비가 4천만원이라고 해도 운전기사와 생활도우미 등 인건비에다가 미국에 유학간 아들, 그리고 여기서 미술대학을 목표로 재수하는 딸 등의 교육비, 그리고 남편에게 들어가는 돈 등이 있다. 집안의 각종 잡다한 생활비로도 너무 많이 나가서 내가 정말 쓸 수 있는 돈은 5백만원도 채 안된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수백만원짜리 화장품 세트를 한번에 살 수 있겠나.”
물론 이런 말을 일반인이 들으면 “복에 겨운 소리”라고 비난할 것이다. 하지만 부자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생각하는 규모가 있고, 생활 방식이 있다. 즉 ‘자기 기준에서 나름대로 그들도 매월 생활고에 허덕인다’는 말이다.
현재 서울 강남구에는 약 4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대한민국 전체 부자 중 35~40% 정도가 강남구에 거주하고 있다. 이처럼 가히 ‘대한민국 특별구’라 할 수 있는 강남구 거주자들의 한 달 생활비는 얼마나 될까. 약 1천5백만원에서 5천만원 이하가 거의 대부분이다. 월 생활비가 1천5백만원이라는 것은 일반인들이 상상하기에는 힘든 액수지만 그들로서는 외제차를 굴리기에도 너무나 힘에 겨운 ‘생활고(?)’의 연속이다.
한 달 생활비가 5천만원인 가정은 어떠할까. 그 집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들은 한 가정에 약 5대 정도의 고급 외제차를 굴린다. 이것 저것 쓰면서 차 5대를 관리하다보면 월 생활비 5천만원으로도 헉헉댈 때가 있다. 어떤 때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를 한 달에 2천만원씩 써대는 경우도 있다. 다음 달에 비싼 이자를 치르는 것이 너무나 속이 쓰리지만 할 수 없는 것이 이러한 부잣집의 체면이고 또 실상이다.
TV에서처럼 그렇게 화려한 신데렐라는 대한민국에 거의 없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그런 제품을 구매하는 부자도 거의 없다. 한국의 부자는 대부분이 일반인들에 비해 (물론 일반인들과 소비하는 방식과 규모의 차이를 감안해야 겠지만) 좀 여유 있게 쓰는 수준이거나 그나마도 ‘헉헉거리면서’ 강남의 백화점이 세일할 때만 은근히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부자 체면에 세일 기간에 샀다는 것이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나 그래도 정가로 사기에는 비싼 것을 느끼는 것이 상당수 부자의 본모습이다. 부자들과 생활을 같이 해보거나, 부자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면 ‘우리나라의 부자들이 별 것 아니다’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미국에는 1천만달러(약 1백억원) 이상의 소유자가 40만 명이 훨씬 넘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1백억원 이상의 소유자는 아무리 찾아내도 1만 명이 채 안된다. 1백억원 이상의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할아버지, 평소 4천원짜리 국밥을 먹으면서 어쩌다 기분나면 5천원짜리 제육볶음을 어렵게 시켜먹는 중년의 아저씨가 강남구에는 아직도 많다.
30억원짜리 진주가 국내에 들어왔다고 해도 실제는 아무리 많이 팔려야 1년에 2개가 채 안 팔린다. 1천9백만원짜리 수제양복을 러시아 쪽의 부자와 대구의 한 거부가 사갔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것이 그 해에 팔린 유일한 두 벌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실제 대부분의 부자들은 ‘별것’ 아니다. 일반인이 돼지갈비 먹을 때, 부자는 소갈비 먹는 정도다. 먼저 부자에 대한 환상 말고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 <부자도 모르는 부자학개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