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하나하나 전사로 키울 것”
▲ 유상철 대전 시티즌 감독이 지난 7월 23일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감독 데뷔전. 대전 시티즌이 강원FC를 상대로 선취골을 넣자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
―처음에 대전 구단 측으로부터 감독직 제의를 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구단 사정이 굉장히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정말 어려웠다. 내가 계획한 일정들이 갑자기 바뀌니까,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할지, 혼란스러웠다. 난 고등학교(춘천기계공고)에서 어느 정도 성적을 올려놓은 후 P라이센스(지도자 자격증의 최고 단계)를 준비하려 했다. 프로팀? 물론 항상 마음속에는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전 측의 감독 제의가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축구계의 승부조작 사건을 보면서 같은 축구인으로서 책임감을 느꼈다. 부를 누리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라면 대전의 제의를 거절했어야 맞다. 그러나 뉴스를 보며, 선수들의 얘기를 들으며,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책임감 같은 게 대전의 감독 제의와 맞물리면서 받아들이게 됐다.
―주위 사람들,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축하한다는 말보다 걱정과 우려의 시선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반반이었다. 대부분 처음에는 ‘축하한다’고 말한 다음, ‘힘들겠다’라는 얘기를 항상 덧붙이더라. 솔직히 나도 프로팀 감독을 맡을 만한 준비를 해 놓고, 좋은 시스템이 구축된 팀에서 환호와 응원을 받으며 부임했더라면 얼마나 기분 좋았겠나. 그러나 생각을 바꿔보면 나한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젊을 때, 최악의 상황도 겪어 보고, 남들이 다 안 된다는 위기 속에서 그걸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특히 더 이상 나빠질 게 없지 않나. 내가 이 팀을 맡을 때가 최악이었고, 가장 밑바닥에 내려간 상황이기 때문에 앞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다.
―굉장히 긍정적인 마인드다.
―대전 사령탑으로 부임 후 일주일 만에 강원FC와의 경기에 나서 데뷔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대전은 110일간 이어진 무승에서 탈출한 기록도 세웠는데, 선수들 이름은 외우고 첫 경기를 치른 건가.
▲(웃으면서) 못 외웠다. 선수들 유니폼 뒤에 새긴 이름과 등번호를 보고 누구인지를 알았다. 아마 감독 부임 후 일주일 만에 게임 치른 건 나밖에 없을 것이다. 선수들은 이미 감독이 없는 상태에서 두 게임을 치렀고, 7실점이란 스코어로 두 번이나 패한 터라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짧은 시간 동안 팀을 재정비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그래서 선수들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하려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경기에 임하는 자세와 경기 중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플레이를 해나가야 하는 부분 등 기본적인 얘기를 하면서 경기를 준비했다. 다행히 선수들이 잘 따라왔고, 감독 데뷔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해 뛰었다. 그 첫 승이 굉장히 큰 용기를 준 것 같다. 선수들보다 나한테 말이다.
―선수단과 함께하기 전, 힘들 거란 예상을 하고 왔을 텐데, 막상 부딪쳐보니까 어떤 점이 어려운가.
▲난 선수단 숙소를 보고 깜짝 놀랐다. 대전 숙소가 열악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는데,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프로 열다섯 팀 중 최악일 것이다. 그런데 3주째 지나니까 적응이 되고 이 숙소랑 친숙해지더라. 시설과 환경 때문에 경기를 제대로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건 프로답지 못한 생각이라고 선수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내가 있는 동안 개선해야 할 부분은 과감히 개선해 나가고 싶다. 그 부분은 이미 구단 측에 여러 번 얘기했다. 구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믿는다.
―항간에는 유 감독이 처음 구단과 계약을 맺을 때 너무 형편없는 조건(계약기간 1년 6개월, 연봉 1억 5000만 원 추측)을 받아들인 게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축구인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계약 조건이란 얘기도 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이란 타이틀을 내세우면 더 좋은 대우를 받고 가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난 부를 이루기 위해 여기에 온 게 아니다. 책임감 때문이다. 선수들이 왜 승부조작에 걸려들었는지, 왜 대전 팀이 저런 위기에 봉착했는지, K리그가 왜 이런 수모를 겪고 있는지, 그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그게 먼저였기 때문에 그런 조건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계약 기간이 1년 6개월로 알려졌다. 유상철의 축구 색깔을 보여주기에 너무 짧은 시간 아닌가.
▲어떻게 보면 짧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 기간 동안 대전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자신이 있다. 유상철이 와서 대전을 이렇게 변모,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싶고, 그럴 자신도 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 계약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질문은 꼭 하고 싶었다. 대전 시티즌은 시민 구단이라 ‘외풍’도 심하고 구단의 간섭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새로 부임한 구단 사장이 축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유 감독과 의견 충돌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데, 실제로 어떤 편인가.
▲밖에서는 그 분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외부에 알려진 모습과 실제와는 큰 차이가 있다. 사장님이 축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시다. 나도, 사장님도 대전이란 팀에서 새로 시작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공감대도 느끼고 축구단의 부활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신다. 밖에서 보는 것처럼 사장님이 감독이 할 일에 일일이 간섭하거나 지시하는 일은 결코 없다. 내 역할과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나 또한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직접 보고 느낀 사장님은 그런 분이 절대 아니다.
―현재 K리그에는 대표팀에서 함께 뛰었던 선배(황선홍), 후배(최용수) 감독이 있다. 포항과는 이미 정규리그 경기가 끝난 상태고 FC 서울과는 경기가 예정(9월 24일)돼 있다. 어떤 경기를 보여줄 생각인지 궁금하다.
▲다른 팀보다 포항이나 FC서울한테는 절대 지고 싶지 않다. 같이 대표팀 생활을 했던 감독들이라 자존심 차원에서도 패배는 용납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직접 싸운다면 죽기살기로 싸우겠지만 팀 대 팀으로 경기를 펼치는 터라 철저한 준비를 통해 그 팀의 단점을 공략해 나가겠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거라면 나보다는 그들이 더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점이다. 포항이나 FC서울은 최고의 선수들을 가진 최강 팀이다. 그런 팀이 대전한테 잡힐 경우 자존심이 많이 상할 것이다. 지금 당장 욕심을 내기보다는 올 겨울에 준비 잘 해서 다음 시즌, 제대로 붙어 보고 싶다. 대전에 와서 한 달 동안 눈이 아플 정도로 K리그 경기를 보고 또 봤는데, 신기한 건 포항 전북 FC서울 등 상위권에 있는 팀들보다 상주상무, 대구FC, 인천 등이 더 어려운 팀으로 비춰졌다. 그들한테는 별다른 흠이 안 보였다. 이전과 달리 지금은 팀들이 많이 평준화된 것 같다. 저 팀은 정말 이길 수 없겠다, 지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라고 생각되는 팀이 없다. 그래서 해 볼 만하다.
인터뷰 말미에, ‘올 시즌이 끝난 후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유 감독은 단박에 “선수들 모두 전사로 만들고 싶다”고 대답했다.
“프로 선수들이잖아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누구나 탐내고 사고 싶어 하는 퀄리티 높은 전사들을 만들 겁니다. 그래서 올겨울을 기다리고 있어요.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들이기 때문이죠. 대전에 대한, 또 저에 대한 시선이 아직은 불안하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좋은 경기를,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따뜻한 응원 부탁드립니다(웃음).”
대전=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