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괴살해 이두견, 묻지마 차량질주 김용제, 퍽치기 태규식 등 형장 이슬로…파키스탄 조폭들 감형·특사 이후 강제추방
1997년 이후 사형 집행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요즘에는 아무리 흉악 범죄일지라도 법원이 사형을 선고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항소심이나 대법원에 가서 감형될지라도 1심 법원에서는 사형 선고가 나올 법도 하지만 그런 일조차 극히 드물어졌다. 그렇지만 30년 전인 1992년에는 전혀 달랐다. 1990년 역대 최다인 36명에 대한 사형 선고가 이뤄졌고 1991년에도 35명, 그리고 1992년에는 그나마 많이 줄어 26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2심이나 3심에서 감형이 이뤄지지 않고 형이 확정된 1992년 사형 선고자들은 모두 사형이 집행돼 실질적인 ‘마지막 사형수’가 됐다.
#‘범죄와의 전쟁’ 한창이던 90년대 초반엔…
2022년 현재, 사형제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의 시선에서 1992년은 참으로 엄혹한 시기였다. 노태우 정권 마지막 해, 군사정권 마지막 해이기도 하다.
1990년 10월 13일 노태우 정부는 ‘10·13 특별선언’을 통해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1992년까지 약 1만 6000명의 경찰이 충원되고 경찰청 보안부는 방범국으로 개편됐다. 이런 시대의 흐름 때문인지, 아니면 그만큼 강력 범죄가 많아 범죄와의 전쟁까지 선포된 것인지 1990년에는 사형 선고가 무려 36명에게 이뤄졌다. 1991년에도 35명, 1992년 26명으로 조금 줄었지만 1994년 다시 35명으로 늘어났다.
2000년 20명, 2001년 12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고 2002년 7명을 기록한 뒤 계속 한 자릿수가 유지됐다. 2007년 처음으로 단 한 명도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았지만 2008년 2명, 2009년 5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서서히 사형 선고는 줄어들어 이제는 사형제가 형벌의 실효성을 상실해 ‘사형 선고가 마땅한 사건’에서도 무기징역형이 선고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81년 33명, 1982년 35명 등 1980년대 초반에도 법원의 사형 선고가 많았지만 당시에는 정치범에 대한 사형 선고도 많던 시절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결국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던 것도 바로 그 즈음이다. 반면 1990년대 초반 급증한 사형 선고는 대부분 강력 범죄였다.
1992년 1월 31일 서울지법 동부지원 형사부는 다방에 몰래 들어가 내실에서 자고 있던 종업원을 식칼로 찔러 사망에 이르게 한 뒤 금품을 훔쳐 달아난 전 아무개(당시 22세)에게 강도살인죄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다방 옥상에 숨어 다른 직원이 모두 퇴근하기를 기다리는 등 계획범죄이며 범죄 행위가 잔혹했으며 이미 여러 차례 절도 혐의로 처벌을 받았지만 개전의 정이 전혀 없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다.
1992년 2월 12일에는 김동준 유괴살인사건의 피의자 이두견(당시 24세)이 서울지법 의정부지원 형사합의부에서 미성년자 약취유인과 살인 및 사체유기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91년에는 이형호 유괴살인사건, 이득화 유괴살인사건에 이어 김동준 유괴살인사건까지 무려 3건이나 유괴살인사건이 벌어져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었다.
이 사건은 1991년 12월 27일 오후 의정부에서 발생했는데 고 김동준 군을 유괴한 뒤 김 군 부모에게 700만 원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다 발신 위치가 추적된 이두견이 하루 뒤인 12월 28일 정오 무렵 의정부 그랜드호텔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세 번째 협박전화를 하고 나오다가 긴급 체포됐다. 이두견은 이미 27일 김동준 군을 유괴한 뒤 부모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바로 목 졸라 살해해 암매장했다. 결국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이두견은 1995년 11월 2일 지존파 일당 등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서울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김용제 사형당한다고 이런 범죄가 없어지겠나”
1991년 11월 29일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살인사건’의 피의자 김용제(당시 22세)는 1992년 3월 20일 서울고법 형사4부의 항소심 선고공판에서도 원심대로 사형이 선고됐다.
여의도광장 차량질주 살인사건은 당시엔 그 개념조차 낯선 ‘묻지마 살인’이었다. 범인 김용제는 20대 시각장애인으로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어린 시절부터 어려움을 겪었고 안정된 직장은 물론, 급여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다니던 화곡동 양말공장에서 해고된 뒤 세상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고 몰래 복사해 놓은 양말 공장 사장의 승용차 열쇠를 가지고 실행에 들어갔다.
1991년 10월 19일, 차를 몰고 여의도광장으로 진입해 질주를 벌여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을 차로 치었는데 이들은 바로 즉사했다. 이후 어린이와 노인 등 21명에게 부상을 입힌 뒤 자전거 보관함을 들이받았다. 차량이 멈춰지자 김용제는 바로 시민들에게 붙잡혔지만 이를 뿌리치고 여중생을 인질로 잡았다. 하지만 다시 시민들에게 제압당했다.
결국 1992년 8월 1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 1997년 12월 30일 다른 사형수 22명과 함께 형이 집행됐다. 그때가 마지막 사형 집행이라 김용제는 마지막 사형수 22명 가운데 한 명이다. 조성애 수녀와 주고받은 편지와 김용제의 옥중 일기 등을 엮은 책 ‘마지막 사형수’가 출간되기도 했다.
김용제는 사형수가 된 뒤인 1992년 6월 19일 서울구치소 안 교회당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고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집전했다. 이 자리에는 김용제의 여의도광장 차량질주로 사망한 유치원생의 할머니 김 아무개 씨도 참석해 김용제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날 기자들을 만난 김 씨는 “김용제가 사형당한다고 이런 범죄가 없어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김용제는 사형 집행을 앞두고 신장 기증 의사를 밝혔지만 아쉽게 그 뜻이 이뤄지진 못했다.
1992년 4월 7일에는 부산지법 제3형사부는 경남지역 일대에서 대낮에 가정집에 들어가 90여 차례 강도강간을 일삼은 가정파괴범 4명 가운데 이상수(당시 23세), 전장호(당시 20세)에게 사형이 선고했고. 노 아무개(당시 20세)는 무기징역, 황 아무개(당시 17세)는 장기 12년 단기 7년을 각각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대낮에 부녀자만 있는 집을 골라 절도 행각을 벌인 뒤 신고를 막기 위해 부녀자를 번갈아 성폭행까지 한 행위는 어린 나이지만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라며 사형 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은 이상수와 전장호는 김용제와 함께 1997년 12월 30일 사형이 집행돼 역시 ‘마지막 사형수’가 됐다.
1992년 5월 19일에는 대구지법 형사11부에서 퍽치기 일당 5명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렸다. 무려 150여 차례에 걸쳐 강도 및 살인을 일삼아 온 이들 일당에 대해 법원은 태규식(당시 24세)에게 살인 및 강도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고 원 아무개(당시 26세), 김 아무개(당시 25세) 등 2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다른 일당 2명에게는 각각 징역 15년과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태규식 역시 1997년 12월 30일 사형이 집행된 22명의 ‘마지막 사형수’ 가운데 한 명이다. 이들 퍽치기 일당은 교도소 동기와 학교 선후배 등으로 대구의 한 여관에서 합숙하며 퍽치기와 아리랑치기 등의 범죄를 150여 차례 저질렀다.
1992년 9월 1일에는 수원지법 형사합의11부는 부인을 살해한 뒤 불을 질러 시신을 암매장한 정 아무개(당시 40세)에게 살인 및 시체손괴 및 은닉죄 등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정 아무개는 5월 25일 수원시 88공원에서 이혼 요구를 거절하는 부인 남 아무개 씨(당시 39세)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인근 영동고속도로변으로 끌고 가 불을 질러 암매장했다. 사형을 선고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나일론 끈 등을 미리 준비한 점으로 볼 때 계획범죄이며 반인륜적인 살인 행위”라고 밝혔다.
1992년 12월 4일 대구지법 김천지원 형사합의부는 강도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기소된 최 아무개(여·당시 31세), 윤 아무개(여·당시 49세)에게 각각 사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7월 2일 최 아무개의 의붓시동생 오 아무개 씨(당시 32세)를 마을 앞 산 정상으로 유인해 신경안정제 10알을 탄 음료수를 마시게 한 뒤 실신하자 돌멩이 등으로 마구 때려 숨지게 한 뒤 시신을 인근 웅덩이에 버렸다.
#국내 최초 외국인 사형 선고, 그 뒷맛이 씁쓸한 까닭
1992년 9월 29일에는 국내 최초로 외국인에 대한 사형 선고가 이뤄졌다. 서울형사지법 합의25부는 국내에서 자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범죄단체를 조직해 보복 살인을 저지른 혐의로 구속 기소된 파키스탄인 조직폭력배 ‘주비파’ 조직원 아미르 자밀(당시 23세)과 미안 무함마드 아자즈(당시 31세) 등 2명에게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또한 ‘주비파’ 두목 임란 사자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상대 조직 ‘비키파’ 두목 사자르 알리 등 10명에게는 징역 15년형에서 5년형이 각각 선고했다.
이태원을 무대로 활동하던 파키스탄 범죄조직 주비파와 비키파의 충돌로 빚어진 사건으로 당시 검찰은 이들 조직이 국내 폭력조직과 연계될 경우 엄청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법정 최고형을 구형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1993년 5월 대법원에서 아미르와 무함마드는 사형, 임란은 15년, 나머지 셋은 5년 형이 확정됐다. 그렇지만 이들은 1997년 12월 30일 마지막 사형 집행 대상자에선 빠졌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 김형태 변호사 등이 거듭 아미르와 무함마드는 무죄라며 실질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은 ‘주비파’ 두목 임란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재심을 청구하는 등 구명 운동을 벌이고 있어 사형 집행 대상에서 빠지게 된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인 1998년 광복절 때 아미르와 무함마드는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로 감형됐고, 1999년 2월 3·1절 특사로 석방됐다. 고 김 추기경 등이 주범이라고 주장한 두목 임란도 함께 덩달아 3·1절 특사로 석방됐는데 이들은 모두 당일 강제 추방됐다.
한편 김대중 정부부터는 아예 사형 집행이 중단됐다. 25년가량 사형 집행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국제앰네스티는 대한민국을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현재 사형 선고가 확정된 사형수 59명이 복역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가장 오래된 사형수는 1993년에 사형이 확정됐다. 따라서 집행을 기준으로 볼 때 실질적인 마지막 사형 선고는 1992년이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홍준표 국민의힘 의원이 사형제 부활을 주장하면서 상당한 논란이 불거졌다. 1992년 당시에도 이미 한국 사회에서 사형제를 둘러싼 논란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실질적 사형폐지국이 된 오늘날에도 같은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1992년 당시 사형 선고가 이뤄진 ‘묻지마 살인’ ‘강도강간’ ‘퍽치기’ ‘부인 등 가족 살인’ 등의 잔혹한 범죄는 30년이 지난 2022년에도 반복되고 있고, 더 강력하고 파렴치한 범행이 새로 등장하기도 했다.
반면 억울하게 사형수가 된 이들도 있고, 사형수가 된 뒤 교도소에서 참회했지만 결국 사형이 집행된 사례도 있다. 사형제도와 인권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