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기 올인’ 그게 최선입니까
▲ 이청 씨가 초당대에서 한국 바둑사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
초당대의 슬로문화연구센터는 슬로푸드(food), 슬로시티(city), 슬로스포츠, 슬로교육 등을 표방한다. 슬로푸드는 1986년 이탈리아에서 맥도날드 햄버거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 데서 시작되었다. 표준화-획일화한 저급 음식과 장시간-저임금-무노조 고용 형태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패스트 푸드 반대운동으로 저항의 돌파구를 삼은 것. 맥도날드 반대 운동은 1989년 ‘슬로푸드’ 선언문과 함께 급속히 국제운동으로 확산되면서 ‘슬로 라이프(life)’ 운동으로 나아갔다. 슬로푸드가 지향하는 바는 우리가 아는, 상식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인데, 그 중 하나 ‘유전자 조작 반대’는 각별히 눈에 띄는 항목이다.
슬로시티는 슬로푸드의 자연스런 연장선이며 역시 시발은 이탈리아. 2010년 현재 세계 20여 나라에서 약 130개 도시가 가입했고,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전남의 신안 담양 장흥 완도 4곳이 ‘국제 슬로시티 연맹’으로부터 처음 지정 받은 이후 경남 하동과 충남 예산이 합류했다. 돌담길, 한옥, 재래시장, 갯벌, 천일염, ‘구들장처럼 만들어진 논’, 어촌풍경 이런 것들이 남아 있는 곳, 이런 곳들을 잘 지켜가고 있는 곳이 슬로시티다.
슬로라이프, 슬로시티를 지향하고 슬로문화를 연구하는 초당대가 바둑과 만난 곳은 교양학부 과정이 얼마 전에 신설한 ‘인성 특강’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슬로라이프, 인성 회복, 그리고 바둑. 정말 좋은 만남이다.
9월 20일 오후, 한국 바둑의 역사적 흔적이 담긴 문헌-자료의 발굴-수집-연구-소개에 거의 독보적인 내공을 발휘하고 있는 이청 씨(50)가 ‘세계 최강 한국 바둑을 즐기자’라는 플래카드가 건물 입구에 큼지막이 걸려 있는 교양학부 5층 강의실, 200여 명의 학생 앞에서 2시간 속강으로 테이프를 끊었다. 주특기가 바둑사 연구인 만큼 강의 내용은 한국 바둑이 왜 세계 최강이며 최강일 수 있는 것이냐에 대한 역사적 논증이었다. 이어 21일에는 교수들을 상대로 한국 바둑의 어제와 오늘을 설파했다.
모든 사람의 삶은 모두가 각자 한 편의 소설이지만, 이청 씨의 인생도 만만치 않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20대 초반에 겪은 불의의 사고에서부터, 숨죽이며 기다려야 했던 세월을 거쳐 작가 등단, 소설 집필, 해박한 역사 지식, 바둑과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그것 역시 절절한 드라마다.
바둑 강의를 주창한 사람은 교양학부의 김창진 교수(58). 한국 고전문학이 전공이다. 온유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확고한 신념 하나, ‘한자는 중국말이 아니다. 한자도 우리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추호의 양보가 없다. 특히 인명이나 지명 같은 고유명사일 경우 구리 콩지에 베이징이 아니라 古力 孔杰 北京이라고 한자를 노출해 쓰고 그걸 우리 발음 그대로 고력 공걸 북경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 한자를 모르면? 할 수 없다, 공부해야 한다는 거다. 이 논쟁은 근래 몇 차례 바둑 인터넷 사이트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안이고, 김 교수의 인터넷 바둑 아이디 ‘草堂居士’는 이미 유명해져 있다.
바둑은 중국과 교류가 아주 빈번하다. 인명 지명이 항상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데, 생각해 보면 무슨 국어연구소 같은 데에서 정한 외국어-외래어 한글 표기법은, 실소를 자아낸 자장면-짜장면의 예처럼 별 의미가 없다는 느낌도 든다. 위의 논쟁이 발전적으로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구리(古力)’처럼 중국 발음을 적고 괄호 안에 한자를 넣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김 교수의 설명에 95%는 설득을 당했다. 무엇보다도 사실 한자를 읽을 줄 알면 요상한 중국 발음, 일본 발음을 억지로 한글로 적으려고 애쓰느니 김 교수의 방식을 따르는 게 편하니까.
초당대 교수 중에는 ‘바둑3인방’이 있다. 김 교수와 김흥수 교수(56, 체육철학), 김현철 교수(48, 서양철학), 3김 교수이며 이번 바둑 강의에 뜻을 모은 것도 그들이다. 김현철 교수는 또 슬로문화연구센터 연구소장이며 일주일 전쯤에는 연구소 홈페이지에 ‘속기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제목은 단상이었으나 내용은 유감이었고, 비판이었고 질타였다. 하긴 슬로문화 연구소장이 속기를 이해하거나 칭찬할 까닭이 없다.
바둑 실력은 세 사람 모두 이제 ‘단’에 도전하는 수준. 내세울 게 없다. 그러나 바둑 실력은 별로인 이들이 바둑과 느림의 관계회복을 주선하고 있다. 바둑 실력과 바둑을 사랑하는 정도, 바둑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은 다르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바둑이 속기로 망가진다면, 그래도 그때 다시 바둑을 두게 된다면 그건 이런 사람들 덕분일 것이다.
‘초당(草堂)’하면 다산 정약용 선생이 머물던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이 먼저 떠오른다. 무안과 강진은 이웃이다. 무안 바닷가 초의 선사 생가 주변 언덕에 서면 목포와 목포 앞바다 섬 압해도를 잇는 압해교와 압해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푸른 바다의 절경이 그림처럼 떠 있다. 초의 선사 기념관에는 추사 선생과 선사가 교류했던 그 옛날의 자취가 어쩔 수 없이 고답한 훈향으로 흐르는데, 압해교 건너 왼쪽이 김인 국수의 고향 강진이고, 거기서 반 발자국 떼면 조훈현 9단의 고향 영암이며, 압해교의 오른쪽이 이세돌 9단의 고향 신안 앞바다 비금도다. 인연의 바람, 인과의 파도가 오늘도 새롭다.
이광구 바둑전문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