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혜 아닌 배려가 필요해
▲ 올초 일본 오릭스 버팔로스와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경기 5회말. 오릭스 선발투수 박찬호가 투구를 하다 중심을 잃고 주저앉고 있다. 연합뉴스 |
10월 초 일본 도쿄에서 만난 일본 프로야구 관계자는 “정규 시즌이 끝나는 대로 오릭스가 박찬호와의 결별을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사실 놀라운 소식도 아니었다. 9월 중순부터 일본 언론들은 ‘오릭스가 박찬호와 재계약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해왔다. 박찬호가 올 시즌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외국인 선수라는 점을 고려하면 시즌 중 재계약 포기를 발표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아시아인 최다승을 거둔 대투수인데다 오릭스가 한국 정서를 고려해 ‘정규 시즌 종료 후 결별 발표’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안다”며 “오릭스의 입장을 박찬호도 알고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일요신문>의 취재 결과 9월 하순, 박찬호는 오릭스 측에 재계약 의사를 타진했다. 자신의 내년 시즌 거취를 정하려면 오릭스와의 재계약 문제를 매듭짓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오릭스는 고심 끝에 재계약 의사가 없음을 박찬호 측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박찬호는 일본 내 다른 구단과 접촉해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겠다는 방침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내세울 성적이 없다.
올 시즌 박찬호는 7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1승 5패 평균자책 4.29를 기록했다. 4점대 초반의 평균자책이 높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퍼시픽리그에서 3점대 평균자책은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올 시즌 반발력이 떨어지는 공인구를 사용하며 일본 프로야구엔 1, 2점대 평균자책 투수들이 수두룩하다.
5월 30일 이후 2군에 내려가고 시즌 종료 때까지 1군을 밟지 못한 것도 감점 요인이다. 박찬호는 구위 저하뿐만 아니라 햄스트링 부상으로 줄곧 2군에 머물렀다. 무엇보다 박찬호의 몸값이 걸림돌이다. 박찬호는 오릭스와 1년간 연봉 120만 달러, 옵션 100만 달러 등 총 220만 달러(약 25억 원)에 계약했다. 당시 엔화로 환산하면 2억 엔이 넘는 고액이었다. 일본에서도 2억 엔 이상의 고액 연봉자는 드물다.
물론 박찬호 영입을 통해 한국 방송사와 중계권 계약을 맺는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하지만, 흥행은 실패였다. 한국 프로야구 인기에 오릭스 중계가 완전히 밀렸다.
박찬호의 미국 복귀는 더 힘들어 보인다. 나이가 문제다. 내년이면 박찬호도 마흔 살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40대 투수는 드물다. 일본에서도 박찬호는 1승만을 거뒀을 뿐이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박찬호의 미국 복귀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애초 박찬호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현역생활을 정리하길 바랐다. 수시로 “한국에서 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뛰고 싶은 팀으로 한화를 지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박찬호의 한국행은 제도에 막혀 좌절되기 일쑤였다.
KBO 야구규약엔 ‘1999년 1월 이전에 해외로 진출한 선수는 연고구단에 입단할 수 있으며, 그러려면 당해 신인 드래프트 2주일 전까지 KBO에 입단신청서를 제출해야 하고, 해당 선수를 데려오는 구단은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규약대로라면 박찬호는 내년 시즌을 온전히 쉬어야 한다는 뜻이다. 박찬호의 나이를 고려할 때 이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박찬호 특별법’이었다. 박찬호가 국내 무대에서 뛸 수 있게 현행 규약을 뛰어넘는 특별법을 제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구계의 반응은 차가웠다. 일부 구단 단장은 “박찬호가 한국 프로야구에 뭘 이바지했다고 특별법까지 만들어 데려와야 하느냐”며 “정말 한국에서 뛸 의지가 있으면 정식 절차를 밟아 2013년부터 뛰면 될 것”이라고 강경한 어조로 입장을 밝혔다.
문제는 박찬호 측도 특별법 제정에 부정적이라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다. 먼저, 박찬호는 특별법이 ‘특혜’로 받아들여질까 우려하고 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한국 무대를 밟느니 차라리 한국행을 포기하겠다는 자세다. 두 번째는 복귀 시한이다. 만약 특별법이 제정된다면 박찬호는 당장 내년부터 한국 무대에서 뛰어야 한다. 하지만, 박찬호는 2, 3년간 현역생활을 지속하고 싶어 한다. 자신을 원하는 일본 구단이 있으면 당분간 일본에서 더 야구를 접하길 원한다. 특별법이 박찬호의 향후 계획과 충돌을 빚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박찬호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박찬호 측은 내심 특별법 제정보단 언제든 한국에서 뛸 수 있도록 제도가 정비되길 바란다. 바로 ‘1999년 이전 해외로 진출한 선수는 반드시 신인 드래프트를 거쳐야 한다’는 제도가 삭제되길 바라는 것이다.
많은 야구인은 박찬호 측의 바람이 현실적으로 가장 타당한 한국 진출 방법이라고 말한다. 한 야구해설가는 “이 조항이 처음부터 박찬호 특정인을 겨냥한 데다 한국행을 돕는 게 아니라 되레 한국행을 막으려는 소지가 다분했다”며 “특혜논란을 막고, 박찬호가 언제든 한국에서 뛸 수 있다는 의미에서 해당 조항 삭제가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특히나 박찬호에게만 해당하는 조항이기에 규약에서 삭제해도 다른 선수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나쁜 전례도 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KBO 구본능 총재는 야구계의 의견을 수렴해 박찬호의 한국 무대 진출을 다각적으로 검토할 방침이다. 규약의 해당 조항 삭제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KBO의 한 관계자는 “특별법 제정이 아닌 특정인에 해당하는 규약만 삭제한다면 기존 구단들도 반발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한국야구 발전이라는 대의적 측면에서 박찬호에게 특혜가 아닌 배려를 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