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바닷가의 촌동네가 배경인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의 영주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때 그 시간, 그때 그 마음을 상기시켰다. 고등학생인 영주는 관광차에서 내리는 관광객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린다.
“육지 사람들은 맨날 똑같은 이 바다가 뭐가 좋다고…. 무공해, 청정해, 열라 지루해.”
영주의 꿈은 스무 살이 되면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의 집이 있는 제주를 “확, 뜨는 것”이다. 영주는 1964년 발표된 기념비적인 소설,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하인숙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인숙은 안개 가득한 ‘무진’이라는, 이미 낡아버린 전통적 공간을 견디지 못하고 겉돌며 ‘무진’을 그저 떠나고 싶어 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1964년의 하인숙과 2022년의 영주가 어찌 닮기만 하겠는가. 영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분명히 아는 똘똘한 친구인데. 영주는 의과대학에 진학해서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전교 1등인 영주는 조금씩 조금씩 꿈을 이루는 길을 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찌 생이 그리 만만하기만 하겠는가. 영주의 발목을 잡은 것은 떠나고 싶은 촌동네도, 아버지도 아닌, 영주 자신이었다. 영주가 임신을 한 것이다. 어디를 가나 누구네 딸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 없는,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이 촌동네에서 “구리지 않은 건 현”뿐이어서 현과 연애를 했는데 덜컥 아이가 들어선 것이다. 갑자기 세상에 어지러워지고 산란해지고 낯설어졌다. 어찌할 것인가.
이성교제가 금지되었던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이 드라마를 통해 처음 알았다. 학생은 임신과 출산으로 차별받지 않는다는 것이 학생조례에 있다는 사실을. 이 지점에서 이 노희경 드라마가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고등학생이 엄마·아빠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번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내 할머니는 17세에 결혼을 해서 19세에 아버지를 낳았다고 했다. 결혼 당시 할아버지 나이는 22세였는데, 그때는 그 나이가 노총각이었단다. 할아버지는 늘 떠돌기만 하던 마음이 정착하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아버지가 된 경험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10대나 20대 초반에 엄마아빠가 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이 되고 있는 이유는 지금은 그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버지가 산 대로, 어머니가 산 대로 살면 되는 전통사회가 아니다. 지금은 치열하게 현재를 준비하지 않으면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경쟁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나’를 위해 시간과 열정을 투자해야 하는 학생이 엄마·아빠가 된다면?
드라마에서 영주와 현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나온다. 임신을 한 영주를 무시하는 의사, 경멸하는 선생님, 놀라며 놀리는 학생들, 무엇보다도 분노하는 아버지들, 그들의 부정적인 느낌들을 온몸으로 받으며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태아의 심장소리와 서로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은 죄가 아니고 우리의 아이는 실수가 아니라며 저항한다. 이 지점이 공부하는 학생을 둔 엄마아빠들이 두려워 목소리를 높이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가 현실을 너무 미화했다는 것이다. 내 아이가 학교를 다니면서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으려 한다면? 끔찍하다는 것이다.
영주와 현의 사랑이 현실을 미화한 것일까, 혹 우리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우리 틀에 가두며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드라마 때문에 임신을 하거나 결혼을 결심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는 꿈이란 화려한 미래에 대한 그림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배우는 과정 속에서 ‘나’를 이끄는 힘임을 배우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나’의 고유성을 찾고자 하는 젊음이라면 그 열정의 무늬가 어떻든 믿어도 되는 것은 아닐까.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