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70대 노인이 된 지금까지 비밀을 지켜왔다. 정보기관 재정담당이 그 비자금의 사용내역을 폭로하는 바람에 박근혜 전 대통령과 국가정보원장들이 구속되기도 했었다. 그 돈은 국민의 세금이기 때문에 내가 겪었던 일 하나는 말해둬야 할 것 같다. 당시 어느 날 청와대 제2부속실에서 내게 전화가 걸려 왔다. 영부인의 비서관이었다.
“영부인께서 책을 출판할 예정입니다. 표지를 비단으로 만들 예정이니까 그 돈을 보내 주기 바랍니다.”
말은 점잖았지만 명령이었다.
“제가 담당하는 예산은 그 사용 목적이 정해져 있는 비밀 자금입니다. 영부인의 책 표지를 비단으로 만드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어….”
제2부속실 비서관은 순간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청와대는 정보기관의 특수자금을 비밀금고에 숨겨둔 자신들의 돈으로 여겼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영부인들의 행동을 관심 있게 살펴본 적이 있다.
육영수 여사는 민원이 담긴 수많은 편지를 빠짐없이 읽었다. 그리고는 얼마씩을 보내주라고 직접 금액까지 구체적으로 적어 비서실에 내려보냈다. 대학 등록금을 보내주기도 하고 시아버지와 같은 방을 써야 하는 가난한 공무원 부부에게 방 한 칸을 더 얻을 보증금을 보태 주기도 했다. 정보기관의 비밀자금이 그렇게 사용돼 왔던 것으로 보인다.
육영수 여사는 자신을 위해서는 국가의 돈을 쓰지 않은 것 같았다. 육영수 여사는 영부인의 위치와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했던 것 같다. 영부인이라도 인사나 정책에 관여하면 국정농단이 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책적인 결단을 내리지 못해 줄담배를 피우며 밤새 고민을 할 때도 말없이 재떨이만 치웠다고 했다.
육영수 여사는 집안 단속에도 현명했다. 대통령의 아들이 학교에서 다른 아이에게 얻어맞았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 시절로 따지면 왕자가 폭행당한 셈이다. 육영수 여사가 모든 걸 덮고 조용히 넘어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순자 여사는 세상에 자기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다. 총명한 비서관을 두어 영부인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상의하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행동한 것 같았다. 정치적으로 남편이 위태했던 순간 지혜로운 행동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빌라도가 예수를 처형하려고 할 때 그 부인의 조언 비슷한 것이었다고 할까.
전두환 대통령이 군에 있을 때 부하들이 와서 종종 벽에 걸려있는 군인 점퍼를 보고 부러워했다. 그럴 때면 이순자 여사는 말없이 그 점퍼를 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두 벌 세 벌을 부하들에게 주어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 인생에서도 부인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새벽 일찍 찾아간 기자들 중에 여사한테 따뜻한 된장국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수많은 기자들이 ‘김영삼 대통령을 도운 배경에는 부인의 숨은 내조가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반면 어떤 대통령과 수십 년 인연을 맺어왔던 사람은 내게 개인적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평생 관계를 맺고 대통령 출마할 때 매일 새벽에 불려 갔어도 그 부인이 따뜻한 차 한 잔 내다 준 적이 없어.”
김대중 대통령 부인도 현명한 것 같았다. 대통령뿐 아니라 부인도 초창기에는 나름대로 여기저기 돈 쓸 일이 많다. 그래도 대통령뿐 아니라 부인도 국가의 공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요즈음은 김건희 여사가 정국의 폭풍이 되고 있다. 그다지 질이 좋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휘말린 모습들이 언론에 노출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지자들에게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는 내조를 하다 보니 그렇다고 아내를 변호했다.
김건희 여사는 대통령의 부인이 어떤 위치인 것으로 자각했을까. 그리고 어디까지 행동해야 할지 그 한계를 명확히 한 것일까. 내조와 국정농단은 그 구분이 모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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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