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27일 방송되는 KBS '자연의 철학자들'은 '이계진의 끽다끽반' 편으로 꾸며진다.
26년 차 산골 농부로 소박한 삶을 살며 자연에 온전히 마음을 기울이는 전 아나운서 이계진(77)의 삶의 철학을 들어본다.
"조명이 꺼지고 박수가 끝났을 때 당황하지 않고 싶었어요. 자연 속에서 남의 손을 빌지 않으면서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꿈도 있었고요."
1990년대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TV는 사랑을 싣고', '사랑의 리퀘스트', '체험 삶의 현장' 등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로 활약하며 큰 인기를 누렸던 이계진(77) 전 아나운서. 그는 재치 있는 말솜씨와 편안한 미소로 많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던 유명 방송인이다.
KBS 공채 1기 아나운서로 입사했던 그는 1995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전성기를 이어 나갔다. 그러던 와중 1996년 쉰한 살에 느닷없이 '탈서울'을 결심하고는 산촌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귀거래사'를 선택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화려한 조명과 박수가 사라진 뒤의 삶을 미리 준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삶의 무대를 서울이 아닌 시골로 정하기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이가 '무소유'를 실천한 법정스님이었다. 자연으로 깃든 삶은 병약한 부모님과 아내를 위해서도 최선이었다.
다소 무모하고 성급하게 산촌 생활을 시작했지만 어느새 26년째 농사를 짓고 숲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26년 전 이계진 씨가 찾아든 곳은 작은 계곡과 돌샘이 흐르는 화전민의 땅이었다. 거칠기 짝이 없는 그 땅을 잘 가꾸어 '소로우의 숲', '타샤의 정원'을 만들 행복한 꿈을 꾸었다. 그는 26년 동안 매일 돌을 고르고 땅을 갈고 덤불을 걷고 꽃과 나무를 심는 일상을 이어갔다.
금방 지루해질 것 같지만 실은 한 번도 타성에 젖지 않았을 만큼 그 삶은 매우 바빴고 고단했다. 그런 그에게 ‘땅은 건강을 지켜주는 종합병원이었고 부지런한 두 팔다리는 명의나 다름없었다. 영하 23도까지도 내려가는 혹독한 겨울엔 전기와 난방 문제 등 수시로 터지는 사건사고를 손수 해결해가며 산골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연이 가르쳐 준 지혜와 인내심 감사함 덕분이었다.
조명과 박수가 사라진 자리에 채워진 자연, 바람과 햇빛, 새소리, 물소리, 흙내음이 가득하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소박한 일상에 만족하는 삶. 법정스님이 일러준 '무소유'의 의미를 되새기며 절제하는 삶. 차를 마실 때는 차 마시는 것에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는 것에 온전히 마음을 기울이는 '끽다끽반(喫茶喫飯)'의 삶. 성심을 다하는 매 순간이 즐겁기만 하다.
아내와 함께 호젓하게 보내는 시간도, 멀리서 찾아온 벗들과 함께 차와 계절을 즐기는 시간도 어느 한순간 소중하고 아름답지 않은 시간이 없다. 소박하고 평온한 촌부(村夫) 이계진 씨가 자연에서 성찰하며 얻은 단순명쾌한 삶의 철학이다.
30여 년을 방송인으로 살아온 이계진 씨. 마이크를 잡던 그의 손은 지난 26년 동안 하루도 흙을 묻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돌밭을 골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그 누군가'를 위해 매일같이 나무를 심었다. 그 하루하루가 모여 26년이 됐고, 작은 나뭇가지와 뿌리는 울창하게 숲을 이뤘다.
사서 하는 고생이 아닌 사서 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 이계진 씨. 그는 오늘도 Y자 느티나무 앞에 서서 '왜 사는가?' 하는 묵직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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