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리즈만 있나? ‘닥공(닥치고 공격한다)’ 모르면 간첩
▲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생각대로 된 전북
완벽에 가까운 경기력이었다. 단순히 승점 3점씩만 꾸준히 획득해온 게 아니었다. 결과뿐 아니라 내용까지 좋았으니 금상첨화.
올 시즌 K리그를 대표한 최고의 히트 상품은 뭐니뭐니해도 전북의 ‘닥공’이었다. ‘닥치고 공격한다’는 의미가 담긴 이 캐치프레이즈는 언제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10월 22일 대전 시티즌과 시즌 29라운드까지 승점 62점. 5월 말 이후 줄곧 선두를 달려왔으니 완벽한 시즌이었다.
정규리그 1위를 확정 지은 29라운드까지 66득점이었는데, 경기당 평균 2.28골이다. 전북은 2009년 리그 정상을 밟은 당시에도 평균 2.11골을 성공시킨 바 있다. 진정한 공격 축구의 진수를 펼쳐 보인 셈이다.
항상 시즌을 앞두고 언론 인터뷰가 진행되면 각 사령탑들은 “팬들이 좋아할 만한 공격 축구를 펼치겠다”고 약속해왔지만 제대로 지켜진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이해의 시선도 있었지만 대개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감독들의 공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주를 이뤘다.
전북 최강희 감독은 정규리그 1위를 확정지은 뒤 사석에서 만나 “닥공은 우리가 갖춘 팀 컬러가 돼 버렸다. 나라고 왜 수비에 무게를 둔 경기를 전혀 하지 않고 싶겠는가. 때로는 유혹을 받는다. 한 골을 내주면 두 골을 넣는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냥 우리 선수들이 그렇게 공격적으로 하고 있다. 버릇이 됐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있으니 이제 바꾼다고 해도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올 시즌 정규리그에서 16골을 몰아친 국내 최고 골게터 이동국이 중심에 있었고, 루이스와 에닝요 등 브라질 용병 공격 듀오도 톡톡히 제 몫을 해줬다. 여기에 특급 조커 김동찬이 꾸준히 공격 포인트를 추가하며 힘을 보태줬다.
하지만 전북에 화려함만 남아있었던 건 아니었다. 묵묵히 희생한 조력자들도 있었다. 공격력이 빛을 발할 때 그들의 자리를 한 걸음씩 더 뛰며 부지런히 메워야 했던 수비수들이다. 지난 시즌에 비해 전북이 가장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홀딩맨(수비형 미드필더)을 한 명 줄였다는 점이다. 김상식-정훈이 버티던 라인업은 올 시즌 전북의 팀 모토가 ‘닥공’으로 흘러가자 자연스레 한 명만 출전하게 됐다. 공격진을 보강할수록 디펜스 진용이 얇아지는 건 당연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북은 끈끈한 수비를 펼치며 가장 적은 실점을 한 팀에 속했다. 최 감독이 고마워하는 것도 바로 수비수들이다. “공격수들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수비수들은 희생했다. 골키퍼 권순태가 빠지면서 수문장에 큰 공백이 생길 것 같아 걱정을 했는데, 김민식이 아주 잘 메워줬다. 우리의 상승세의 원동력은 수비수들의 빛나는 희생 정신이 팔할 이상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최 감독 특유의 유머감각도 흥미진진했다. ‘닥공’도 실은 인터넷 서핑을 즐기는 최 감독이 우연히 축구 게시판에서 발견한 문구에서 나왔다. 한 팬이 “전북 축구는 닥치고 공격”이라고 한 것을 본 따 올 시즌 개막 직전 미디어데이에서 “닥공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포기해야 할 부분들도 있었다. 전북이 워낙 잘나가서일까. 쉼 없이 바뀌는 상황과 바쁜 일과로 인해 최 감독은 심심할 때 한 번씩 켜보곤 했던 인기 컴퓨터게임 스타크래프트를 접어야 했고, 이따금씩 곧잘 해온 미니홈피와 개인 블로그도 모두 닫아야 했다.
▲ 최강희 감독과 전북 선수들이 가벼운 달리기로 몸을 풀고 있다. 전북은 ‘닥공 축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등 줄곧 선두를 달리며 완벽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10월 15일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성남 일화가 FA컵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자 고개를 숙여야 했던 두 팀들이 있었다. 바로 축구인들이 한목소리로 “이들만큼은 반드시 아시아 무대에 도전해야 한다”고 밝혔던 FC서울과 수원 삼성이다. 특히 수원은 아예 FA컵 결승 무대에서 성남과 격돌했으니, 쓰라림은 더했다.
성남이 챔스리그 출전권 한 장을 차지하자 당장 비상이 걸렸다. 서울과 수원 중 누군가는 울어야 하는 상황. 막판까지 정규리그 3위 경쟁이 펼쳐진 것도 당연했다. 만약 리그 3위로 마칠 경우, 6강 PO와 준PO를 연이어 홈에서 치를 수 있다는 어드밴티지가 주어진다.
서울과 수원은 K리그 최고 명문 구단이라는 타이틀을 놓고 엎치락뒤치락 해온 전통의 명가였다. 어디까지나 가정법에 불과하지만 서울과 수원이 6강 PO를 뚫고 나면 포항이 대기하고 있는 PO 진출을 놓고 서로 격돌해야 한다.
올 시즌 서울과 수원은 너무 많은 걸 잃어버렸다. FA컵과 올해 챔스리그에서 각각 8강, 4강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오직 K리그만 남았다는 절박감도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솔직히 말해 서울이 보다 아쉬웠다. 서울 최용수 감독대행은 쿨하게 “괜찮다”고 인정했지만 나와서는 안 될 곳에서 나온 한 차례 오심으로 순위가 바뀌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썼다. 그 파장이 마지막까지 미쳤음은 물론이다.
8월 중순 이후 서울은 줄곧 전북-포항 스틸러스에 이어 3위를 달렸다. 그러나 10월 3일 수원과의 원정전에서 결정타를 맞았다. 명백한 오프사이드 실점으로 4위로 내려앉았고, 결국 그 상태에 끝까지 머물러야 했다.
이후 수원이 성남과 FA컵 결승전에서 비슷한 상황으로 실점한 것에 대해 서울을 비롯한 상당수 타 구단 관계자들이 별로 안타까워하지 않았던 건 당연했다. 물론 심판 판정까지 물고 물리는 상황이 축구 팬들에게 흥미를 줬음은 물론이다.
포항도 인상적인 정규리그 기간을 보냈다. 사실 우려의 시선도 있었다. 말도 많고, 탈도 가장 많았던 곳이 바로 포항이었다. 3년간 머물던 부산과 썩 아름답지 못한 모습으로 결별을 택한 황선홍 감독이 포항 지휘봉을 잡으면서 불거진 얘기였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황 감독의 선택은 100% 성공작이었다. 부산이 처음부터 잘 맞지 않는 옷이었다면 포항은 정 반대였다. 현역 시절 화려하게 영일만 그라운드를 수놓았던 레전드의 복귀는 처음부터 핫이슈였고, 본래 팀에 충성스럽고 열성적이었던 포항 팬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크게 기복이 없었다. 내내 2위권을 유지했다. 5월 29일 이후 줄곧 2위를 이어가며 정규리그 종료를 맞이했다. 황선홍 감독의 달라진 리더십이 호평을 받았다. 이전에 황 감독을 둘러싼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는 바로 엄청난 훈련량과 선수들을 편애한다는 내용들이었다. 확인되지 않은 루머에 마음 고생도 굉장히 심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부산에서의 어려움이 포항에서 지도력을 꽃피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다. 어려움을 겪어서인지 여유도 찾았다. 부산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신인왕 다툼을 하고 있는 ‘신예’ 고무열과 500경기 출전을 노렸던 ‘백전노장’ 김기동에게 출격 찬스를 내주는 통 큰 결단으로 세간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
언론을 적절히 활용할 줄도 알았다. 팀이 잘나가고 있을 때 툭툭 내뱉는 한마디에서는 잔뜩 가시가 담겨 있었다. “우리는 이기기는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에 미치지 못한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령탑의 발언에 선수들이 자극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경기를 앞두고선 항상 라커룸에서 선수단 미팅을 하면 화이트보드에 “포항은 최고”라는 말부터 쓰는 황 감독이다. 자부심과 자존감을 심어줌은 물론이다.
다시 돌아온 브라질 용병 모따는 큰 힘이 됐다. 득점과 어시스트에서 두루 제 몫을 해내며 킬러의 명성을 서서히 되찾고 있다. 그러나 가장 강점으로 꼽은 모따가 자칫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불안요소다. 시즌 초반부에 비해 공격적인 축구가 다소 퇴색됐다는 지적도 포항이 풀어야 할 과제다.
▲ ‘축구 명가’ 수원 삼성은 올해 FA컵과 챔스리그 우승을 놓치고 K리그만 남은 절박한 상황이다. |
일찌감치 정해진 전북과 포항의 챔스리그 직행, 서울과 수원의 피를 튀기는 3위 다툼 못지 않게 흥미진진한 승부가 있었다. 바로 6위 진입을 위한 끝 모를 전투였다.
정규리그 막바지 3~4경기를 남기고 순위가 매주 주말만 되면 변동됐다. 29라운드까지만 해도 5위 울산 현대부터 8위 전남 드래곤즈까지 승점차가 불과 3정밖에 나지 않았다.
2013시즌 승강제 시행에 앞서 강등권으로 떨어질 팀을 가릴 차기 시즌을 대비해 일찍 시즌 포기를 결정한 줄 알았던 경남FC의 거듭된 도약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린 내년이 훨씬 중요합니다. 기회는 있지만 욕심 내지 않겠습니다.”
경남 최진한 감독은 9월 말 이후 줄곧 축구 담당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하지만 막상 사령탑이 마음을 비우자 팀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부산과 대구를 연파했고, 29라운드 때는 상주마저 제압하면서 순식간에 경쟁권에 가세했다.
시(도)민구단들 가운데 형님 노릇을 톡톡히 하는 저력을 제대로 보여줬다. 여기에 울산이 막바지에 힘을 내면서 경쟁 구도는 더욱 달아올랐다.
이에 반해 전남은 가장 가여운 팀이었다. 7월 중순까지 4위를 맴돌며 ‘달라진 광양 축구’를 보여주는 듯했다. 8월부터는 5위를 유지했지만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10월 16일 승부였다. 올 시즌 신생 팀 광주FC에 홈에서 일격을 당하며 7위로 내려앉았다. 10월 23일은 포항 원정에서 종료 1분 전까지 앞서다가 종료 직전 통한의 동점 골을 내줬다.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 월드컵에 주력원 상당수를 파견보내고, 팀 내 주축이었던 지동원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선덜랜드로 진출시키는 등 한국 축구를 위해 아낌없이 노력했던 정해성 감독이었지만 한 번 꺾인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무리였다.
부산 아이파크의 행보도 롤러코스터였다. 오락가락 순위가 바뀌는 통에 불안했다. 안병모 부산 단장의 SNS 카카오톡 대화명은 당초 ‘6강 진출 할 수 있다!’였지만 순위 싸움이 진행될수록 ‘6강 진출 해야 한다!’에 이어 ‘6강 진출, 꿈은 이루어진다!’로까지 바뀌었다.
그만큼 구단 최고위층으로서 느끼는 성적에 대한 압박감이 실로 엄청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히 부산은 올 시즌 프로연맹의 새 수장(총재)으로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오면서 ‘회장사(구단)’라는 아주 부담스러운 수식을 얻게 됐다.
제주 유나이티드도 파란만장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제주 박경훈 감독은 모 스포츠지가 내놓은 신년 운세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축축하고 잘 안 풀릴 사주’가 나왔던 것이다. 잠시 잊었지만 다시 떠올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대로 이뤄졌다며 연신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7월 중순까지 3위권을 지키던 제주는 8월 이후 엄청난 추락을 겪었다. 8월 27일 이후 7위까지 추락한 뒤 9월 말부터는 8위, 10월에는 9위까지 내려앉았다.
박 감독은 “정말 사주대로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승부조작 사태에 휘말려 홍정호가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고, 핵심 멤버로 여긴 박현범이 수원으로 돌아가 전력이 약화됐다. 정말 파란만장한 시즌”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대로’ 이뤄진 전북과 완벽히 대조적인 모습의 제주였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