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3일 방송되는 KBS1 '다큐온'은 '황혼의 캔버스' 편으로 꾸며진다.
기나긴 세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난한 살림 일구고, 자식들 키우느라 자기 인생을 쏟아 부어 헌신했던 우리네 어머니들. 그녀들이 황혼에 찾은 충만한 인생 2막. 75세, 83세, 95세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행복하고도 시린 지난날의 추억을 캔버스에 채워나간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할머니들의 그림 열정이 펼쳐진다.
그림경력 12년차, 95세 김두엽 할머니. 83세 때 달력 뒷장에 그린 사과 하나. 그것을 본 아들의 칭찬 한마디가 그림 인생의 시작이었다.
"아따 엄마 솜씨가 보통 솜씨가 아닌데."
과일의 근육(?)까지 표현하는 어머니의 그림 실력은 아들을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그 이후로 시작된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붓을 드는 어머니의 그림을 본 화가 아들은 칭찬만 했다. 서로의 그림을 보고 이야기를 나눌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어머니와 아들.
매일 그림만 그리다보니 저절로 실력이 늘었다는 김두엽 할머니. 유채꽃, 장미꽃, 민들레, 국화꽃부터 나무 밑에서 춤추는 아가씨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첫사랑의 얼굴까지 할머니의 손길로 눈물겹게 정겨운 세상이 태어난다.
"내 인생은 고생만 가득한 인생이야. 근데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이 안나. 그래서 좋아."
1928년에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녀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귀국해 학교 한 번 다녀보지 못하고 시집을 갔다. 끝없이 이어지는 가난과 싸우며 평생 안 해본 일 없이 고생만 하다가 여든이 넘어 노동에서 해방됐다. 처음 가져본 나만의 시간에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경력 13년차, 83세 신희자 할머니. 16살에 바느질을 시작해서 양장, 맞춤복, 한복까지 70년 가까운 세월을 바느질하며 살았다. 그렇게 일을 손에서 놓아본 적 없는 신희자 할머니는 어린시절이 그리워 붓을 들었다.
수채화로 그려내는 옛날 그 때 그 시절. 전기도, 수도도 없었지만 별들이 쏟아지던 밤하늘을 바라보던 그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할머니의 작품엔 4.3과 6.25 한국전쟁 때 벌어졌던 제주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숱한 친구들이 육지로 떠났지만 꿋꿋이 고향 땅을 지키며 아버지, 어머니의 설움을 삼키며 그렇게 돌담에 앉아 오늘도 그림을 그린다.
"우리 아내 참 대견해요. 잡지에 등단해서 초청받아서 서울까지 갔다 왔잖아요."
아침부터 아내의 식사를 챙겨주는 남편. 젊어서는 신희자 할머니의 속을 태우던 상남자였는데 이제는 둘도 없는 짝꿍이자 자상한 지원자다. 책 읽고, 그림 그리고, 바느질 하고. ‘주어진 순간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신희자 할머니는 끊임없이 자신을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예술혼을 불태우는 중이다.
그림경력 5년차, 75세 이재연 할머니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 손자바라기인 그녀는 매일 5살 손자 준영이를 돌보며 성장일기를 그린다. 갓 태어난 아기 때부터 꼼지락 거리는 손과 발을 시작으로 바리깡으로 머리 미는 모습, 친구와 놀이터에서 철봉에 매달리는 모습까지 준영이의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을 그림으로 포착하는 중이다.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들의 어머니로 평생을 헌신하며 지내다가 70세 때 처음 도서관에서 그림을 배웠다. 당시 화가의 눈에 띄어 첫 그림책을 출판했는데 따뜻하고 예쁘고 감동적이라며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그 후로도 계속 그림책을 출판하는 작가다. 하지만 오늘의 그림에 만족하지 않는다. 성실함과 집요함으로 끊임없이 연습에 매진한다.
"새로운 삶을 사시는 것 같아요. 이제야 본인을 위한 삶을 사신다고 할까요. 그게 자식들한테 큰 용기를 주고 있어요."
가족의 응원 속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는 힘을 얻는다. 세월을 아쉬워하지도, 나이를 탓하지도 않는다. 황혼의 캔버스 앞에서 인생 2막을 열고 있는 3명의 할머니 작가들, 그녀들의 전성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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