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그녀가 발달장애란다. 그중에서도 다운증후군. 그녀는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작가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극 중 영희가 그린 그림이 모두 그녀의 작품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캐리커처 작가로서 사람의 특징을 포착해내는 그녀의 능력은 탁월하다. 예쁘게 그려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녀가 말한다. 예쁘지 않은 얼굴은 없다고.
그렇게 사람의 특징을 잘 읽어내는 그녀가 시선강박증을 앓고, 조현병을 앓았단다. 장애인으로서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회피하며 생존해야 했던 아픈 시절이 보이는 듯했다. 우리 모두 그런 시절이 있지 않았는지. 장애가 드러나는 사람을 만나면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했던 때. 드라마에서 김우빈이 하는 말은 우리의 과거고 현실이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
그걸 드라마가 알려준다. 인고의 세월 속에서 지혜를 익힌 여인들의 대화에서다.
“그만들 보라게, 모르는 척하라, 그게 예의다.”
장애는 다른 것이지 죄가 아니다. 죄는 그에 대한 배려도, 예의도 없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모든 것을 설계해 놓고도 뭐가 잘못이냐고, 누가 장애인으로 태어나라 했느냐며 외면하며 빈정대는 냉담한 마음이다.
장애가족이 생기면 가족 모두의 삶이 한순간 변한다. 안타까움도, 괴로움도 느낄 사이 없이 24시간 돌봄을 해야 하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지치고 지친다.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되어도 혼자서는 일상을 꾸려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왜 국가는 관심을 갖지 않을까.
스스로는 목소리도 못 내는 아이들의 부모들이 아무리 소리 높이 외쳐도 국가가, 사회가 입을 다물어버린다면 절망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이 단체로 삭발을 하고, 출근 길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대화 좀 하자는데 왜 시위 방식의 문제만 지적할까.
아이보다 하루 더 사는 것이 희망인 엄마가 그 가짜 희망에 지치고 지쳐 아이와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이 자꾸자꾸 생기는데 왜 모르는 척할까. 지난 5월만 벌써 4건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 일이 알려졌을 때, 생을 포기해야만 했던 그들의 깊은 절망을 그저 이해하는 척하고 넘어가는 분위기는 이제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실에는 발달장애인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는 것 같다.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그 그림을 보여주는 윤석열 대통령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 일이 아무쪼록 자폐 장애인의 고유성까지 섬세하게 살피는 리더가 되는 계기였으면 좋겠다.
아이와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은 살인이라고, 어떤 이유로든지 누구도 생명을 거둬갈 수는 없는 거라고 선언하면서 국가가 책임질 테니 국가를 믿고 기다려달라고 호소하고 설득할 수 있으면 좋겠다.
혼자서 일상을 꾸려가지 못한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고유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짐짝이 아니라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장애인들을 위해 촘촘한 맞춤 설계를 잘하고 있는 나라에서 배우면 된다. 우리와 국력이 비슷한 독일의 장애인 예산은 국가 예산의 2.3%, 우리의 예산은 0.6%다.
몇 년 전 나는 자전거를 타다가 왼쪽 무릎이 깨진 경험을 했다. 그때 몇 달 동안 목발에 의지해 살았는데, 계단 하나 오르는 데 온 신경을 써보면서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게 얼마나 거친지를.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장애인 가족이 될 수 있다.
장애인으로 사는 일은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삶일 뿐이다.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괴로움과 절망으로 무너져가지 않도록, 그 삶이 위축되지 않도록 울타리가 되는 국가가 선진국이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