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녀 불륜녀 ‘왕관 반납’ 굴욕
▲ 지난 6일 제 61회 미스 월드 대회에서 우승한 이비안 사르코스가 왕관을 쓴 채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지난 11월 6일 영국 런던의 얼스코트에서 열린 제 61회 미스 월드 대회의 최종 우승자가 발표되는 순간 객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세계 최고의 미녀로 등극한 이비안 사르코스(22)는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이번 수상이 사람들에게 더욱 화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자란 남다른 환경 때문이다. 8세 때 부모를 잃고 13남매와 함께 고아가 됐던 그녀는 어릴 적 수녀원에서 생활하면서 한때 수녀가 될 꿈을 품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전혀 다른 곳에서 인생 역전을 이루게 됐으며, 가장 많은 미인 대회 수상자를 배출하는 나라로 유명한 베네수엘라 출신으로서는 역대 여섯 번째로 미스 월드 왕관을 쓰게 됐다. 그녀의 수상을 통해 다시금 관심을 모으고 있는 미스 월드 대회의 이모저모를 살펴봤다.
미스 유니버스, 미스 인터내셔널, 미스 어스 등과 함께 4대 미인 대회에 속하는 미스 월드는 지난 1951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시작됐다. 올해로 60주년을 맞는 가장 오래된 국제 미인 대회이자 해마다 100개국이 넘는 나라의 미녀들이 참가하는 대규모 축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스 월드가 처음부터 미인을 뽑는 대회였던 것은 아니다. 국립박람회인 ‘영국축제’ 기간 동안 열린 ‘비키니 대회’가 시초였으며, 당시에는 신상품 수영복을 홍보하기 위해서 열린 패션쇼 성격이 짙었다. 1회성 행사로 기획됐다가 이듬해 바다 건너 미국에서 ‘미스 유니버스’라는 미인 대회가 개최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꿔 미인 대회로 출범했다.
언론을 통해 ‘미스 월드’라고 불리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TV 중계는 1959년에야 비로소 시작됐다. TV 중계가 시작되면서 관심과 인기는 더욱 올라갔으며, 점차 영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이벤트 가운데 하나가 됐다. 특히 60~70년대에는 영국 방송 프로그램 중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으며, 평균 3000만 명이 시청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인기가 올라가자 동시에 비난도 쏟아졌다. ‘머리는 텅비고 얼굴만 예쁜 여자들을 뽑는다’라거나 ‘여성들을 상품화한다’ ‘성차별적인 대회다’라는 등 구시대적인 행사라는 것이 골자였다. 이에 매년 대회장 밖에서는 미인 대회를 반대하는 피켓 시위가 벌어졌으며, 이런 풍경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비난 여론을 의식한 대회 조직위 측은 80년대 들어 ‘목적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내걸고 봉사활동과 자선활동에 중점을 두는 등 새출발을 다짐했다. 또한 몸매뿐만 아니라 지성과 인성을 심사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외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내적인 아름다움도 추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난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결국 대회는 한동안 TV 전파를 타지 못하다가 10여 년 후인 1998년이 되서야 비로소 케이블 채널인 ‘채널5’를 통해 다시 중계되기 시작했다. 21세기 들어서면서 더욱 변화에 민감해진 대회는 2001년에는 미스 나이지리아 출신의 흑인 미녀 아그바니 다레고를, 그리고 2007년에는 동아시아 미녀로서는 처음으로 중국의 장즈린을 우승자로 뽑기도 했다. 가장 많은 우승자를 배출한 나라는 베네수엘라(6회)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영국과 인도가 각각 5회씩, 그리고 미국, 아이슬란드, 자메이카, 스웨덴이 3회씩을 수상했다.
▲ 2007년 동아시아 미녀로서는 최초로 중국의 장즈린이 미스 월드 대회 우승자로 뽑혔다. 로이터/뉴시스 |
하지만 미스 월드는 미스 유니버스를 비롯한 다른 미인 대회에 비해 비교적 논란거리가 많았던 대회이기도 했다. 가장 이슈가 됐던 대회는 2002년 나이지리아에서 열렸던 대회로, 이 대회는 폭력이 난무하고 피범벅이 된 미스 월드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대회로 기록되어 있다.
사건의 발단은 나이지리아 일간지 <디스데이>가 “모하메드가 살아 있었다면 대회 후보들 중에 미녀 한 명을 아내로 맞았을 것”이라고 언급한 데서 시작됐다. 이에 이슬람교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격분한 나이지리아 이슬람교도들이 기독교도들을 공격했으며, 이 폭동은 결국 200명가량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로 번지고 말았다.
또한 이슬람의 전통적인 처벌 방식인 ‘돌팔매 처형’에 대한 보이콧 의미로 몇몇 유럽국들이 불참을 선언하는 등 대회 내내 문제가 끊이지 않았으며, 결국 런던으로 장소를 옮긴 후에야 겨우 대회를 마칠 수 있었다.
왕관을 박탈당한 경우도 세 차례나 있었다. 1973년 미국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스 월드 왕관을 썼던 마조리 월러스는 104일 만에 다시 왕관을 내려놓아야 했다. 대회 조직위 측은 그녀가 “미스 월드로서의 기본 임무를 소홀히 했다”고 설명했지만 사람들은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즉, 그녀의 복잡한 남자관계가 그것이었다.
실제 그녀는 가수 톰 존스, 맨유 축구 선수인 조지 베스트, 포뮬라원 카레이서인 피터 레브슨 등 유명인들과 연이어 교제를 했으며, 영국의 타블로이드지들은 이런 그녀의 연애 행각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또한 베스트가 월러스의 아파트에세 모피 코트와 여권, 수표책 등을 훔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고, 월러스와 존스가 해변에서 키스를 나누는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포착되는 등 구설이 끊이지 않았다.
왕관을 벗은 후에도 자살 의혹에 시달리는 등 언론의 관심을 받았던 그녀는 그 후 배우 겸 TV 진행자로 변신했으며, 1983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엔터테인먼트 투나잇>의 공동 진행자로 발탁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1974년 미스 월드 수상자인 영국의 헬렌 모건은 100일은커녕 불과 4일 만에 왕관을 벗어야 했다. 이유는 역시 남자관계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회 시작 전부터 18개월 된 아들을 두고 있는 미혼모라는 사실 때문에 후보자들 사이에서 자격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미혼이어야 한다’는 최소한의 대회 출전 자격 규정을 어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간신히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미혼모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우승을 차지했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이트클럽 무용수인 린다 러브그로브란 여성이 남편을 상대로 제기한 이혼 소송에서 ‘다른 여자’로 모건을 지적하면서 그녀가 자신의 가정을 파탄 낸 주범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러브그로브의 남편 역시 “3년 전 DJ로 일하고 있던 나이트클럽에서 모건을 만났다”고 털어놓으면서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이로 인해 모건은 스스로 대회 측에 전화를 걸어서 사퇴 의사를 밝혀야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짧은 기간 동안 미스 월드 타이틀을 보유했던 경우도 있었다. 1980년 미스 월드였던 독일의 가브리엘라 브룸이 왕관을 썼던 시간은 단 18시간이었다. 수상 하루 만에 왕관을 벗어던졌던 그녀는 당시 그 이유에 대해 “약혼자가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그녀의 약혼자는 무려 34세 연상인 미국인 영화 제작자 베노 벨렌바움(52)이었다. 벨렌바움은 “우리는 대회 2개월 전에 약혼했다. 그리고 곧 결혼도 할 것이다. 18세 소녀를 그런 감옥에 집어넣고 싶지는 않다”며 반대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 둘은 얼마 후 할리우드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 왼쪽부터 가브리엘라 브룸, 리노르 아바르길, 마조리 월러스, 헬렌 모건. |
1998년 이스라엘의 리노르 아바르길은 대회가 열리기 불과 2개월 전에 성폭행 당했던 사실을 세상에 당당히 공개하면서 박수를 받았다. 당시 19세였던 아바르길은 미스 월드에 당선된 후 이틀 만에 자신의 상처를 털어 놓았으며, 자신을 성폭행했던 이스라엘 여행사 사장을 고발해 징역 16년형을 선고 받도록 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