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사람들은 보이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가치를 두었다. 그런 탐구의 결실로 과학이 발달했고, 현대문명이라는 위대한 업적으로 인류사를 풍요롭게 장식했다. 미술에서도 그런 흔적은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 중심의 관심사는 설득력 있는 미술 언어를 만들어냈고, 적극적이고 다양한 표현력의 결과물인 현대미술을 낳았다.
이에 비해 동양 사람들은 세상 이치를 마음 깊이 새기는 데 더 큰 무게를 두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표현에 이르게 되는 원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서양인들이 지식 탐구에 힘을 쏟는 동안 동양인들은 지혜 터득에서 가치를 찾았다. 미술도 예외가 아니어서 다양한 표현 언어가 발달하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20세기 이후 미술은 서양이 지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순수 동양 미술 표현 언어에서 으뜸으로 삼아온 것은 먹과 붓이다. 표현력 홍수 시대를 감당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언어다. 그런 탓에 서양 현대미술에다 지고의 가치를 둔 추종자들의 눈에는 수명을 다한 표현 언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유독 우리나라 현대 미술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같은 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이 먹을 바탕으로 한 미술 언어를 계승·발전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이런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작가가 김미순이다. 전통적인 먹 작업으로 새로운 감각의 회화세계에 도전하는 강단 있는 작가다. 재료뿐만 아니라 화면 구성에서도 전통 문인화의 여백 구성미를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 회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서양 회화에서 현대성으로 내세우는 ‘모더니티’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김미순 회화에는 전통 회화의 동양적 서정이 서양 현대미술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운 현대성으로 구현되고 있다. 어떤 느낌의 현대성일까.
작가는 10대 초반부터 먹을 다루었다. 그 오랜 세월 단련된 먹에 대한 감각이 새로운 표현 방식의 현대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가 표현 도구로 사용하는 먹은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무채색인 먹의 단계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스스로 만든 대나무 붓을 쓴다. 이런 도구로 마치 드로잉하듯 한 호흡으로 작품을 만든다. 즉 붓 쓰임의 강약과 먹의 짙고 옅음으로 자신이 미리 구성해놓은 이미지를 분출하듯 나타낸다. 이때 힘을 조절하는 것은 물이다. 이런 표현 방식으로 무슨 이야기를 담는 것일까.
그가 그리는 것은 인간이다. 형상이 아니라 사람의 느낌과 기운을 해석해 한 붓으로 표현한다. 인간은 모두 다른 삶을 가지며 일회성의 시간 속에서 인생을 수놓는다는 진리를 김미순만의 먹그림으로 말하고 있다.
비즈한국 아트에디터인 전준엽은 개인전 33회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었다. <학원>, <일요신문>, <문화일보> 기자와 성곡미술관 학예실장을 역임했다. <화가의 숨은 그림 읽기> 등 저서 4권을 출간했다. |
전준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