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44>
▲ 이끼와 넝쿨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경북 군위군 한밤마을의 돌담길. 김동옥 프리랜서 |
지난 1일 오전 3시부터 뜻밖에 폭우를 퍼부어 마침내 세 번째 큰물이 나게 되었다. 백성들은 가뜩이나 놀란 가슴에 또다시 용왕의 침로함을 보고 두려워하야 어찌할 줄을 몰라함으로 이루 형언할 수 없거니와…그중에도 인사동, 교동, 묘동…시내의 전차가 불통하야 교통도 두절하고 또 경의선과 경부선에는 철도와 전신까지 불통되었으므로…시내 경찰서 관내에는 침수한 가옥의 수효가 1500호나 되고 길이 떨어져 나간 곳이 33곳이나 되고 무너진 가옥이 아홉이며 돌담이 무너진 곳이 111군데인데….
전통의 돌담은 정겹다. 재료를 자연에서 얻었다. 하나의 개체인 돌과 다른 개체인 돌이 어우러져 담을 이뤘다. 우리의 돌담은 주변의 자연과도 잘 어울린다. 담의 기능은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일이지만 가르기는 하되, 거칠지 않고 조화롭다. 만약 담이 낮다면 뒤쪽의 나무가 보완을 해준다.
전통 건축물인 돌담은 곡선을 닮았다. 새끼줄에 물을 적시어 축축하게 한 뒤 수평으로 늘어지게 하면 자연스러운 곡선이 생긴다. 이것이 한식 기와지붕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곡선이다. 기와지붕이 자연과 조화를 이룬 데에는 이런 사연이 숨겨져 있다. 돌담의 곡선은 지붕의 곡선과 호흡한다.
돌담은 담 안쪽의 건물과도 하모니를 이뤘다. 담 바깥쪽에서 볼 때 안쪽 건물의 지붕을 가리지 않았다. 건물의 지붕과 담의 지붕이 어우러지면서 곡선의 이중주를 이룬다.
그래서 돌담을 연상할 때 1935년 김영랑(金永郞)의 <영랑시집>에 나오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이 자연스레 떠오르는지 모른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돌담의 원형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경북 군위군 부계면 한밤마을, 전남 완도군 청산면, 충남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등에 가면 자연과 어우러진 아주 긴 돌담을 만날 수 있다.
군위군 한밤마을 돌담은 마을 전체를 감싸면서 6.5㎞ 굽이굽이 이어진다. 예전에 큰물이 덮쳐 마을과 논밭이 돌밭으로 변하자 돌담을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완도군 청산도에서는 영화 <서편제>에서 만났던 돌담을 만날 수 있다. 돌담은 청산도의 심벌이다.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에서는 이끼와 넝쿨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돌담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근대화에 밀려난, 그래서 섬이나 산골에서만 만날 수 있는 돌담을 대도시에서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돌담의 대도시 습격’이라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를 보고 싶다. 자본주의와 발전이라는 19세기 ‘창조물’ 혹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무를 벗 삼아 하늘을 이고 있는 돌담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웃들의 정다운 사연과 슬픔과 기쁨을 풀어내놓는, 우리의 돌담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