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펀치가 ‘만능펀치’로 레벨업
▲ 원성진 9단 |
국내외 누구도 원성진을 경시하지 못하고, 세계대회와도 인연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성적은 별게 없었던 것. 2003년 제7회 LG배 4강, 2004년 제8회 LG배 4강으로 곧 정상에 오를 듯하더니 이후 몇 년 동안은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2008년 마이너 기전인 제7회 춘란배 16강으로 비로소 다시 얼굴을 드러냈고, 2009년 제22회 후지쓰배 본선, 2010년 제2회 BC카드배 64강 본선, 제15회 삼성화재배 본선에 올랐으나 여전히 결실은 없었다.
춘란배는 마이너 기전이고 후지쓰배는 국내 랭킹에 의해 출전권을 획득한 것이며 삼성화재배는 곧 탈락했다. 그게 작년 여름까지의 일이었다. 바둑팬들 사이에서는 동갑내기 최철한 9단과 박영훈 9단은 오래전부터 국내외를 넘나들고 있건만, 원성진은 국내용에 그치고 말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커져갔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원성진에게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지난해 11월, 짧아진 가을이 오는 듯 가버리고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날씨가 겨울의 문턱에서 서성이던 무렵이었다. 제38기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과 제15기 GS칼텍스배, 국내 3대 기전 중 2곳에서 결승에 올라갔다. 명인전 칼텍스배 KT올레배가 국내 3대 기전이다. 박영훈 9단과 결승5번기를 벌인 명인전에서는 2승3패로 아깝게 졌다. 그게 11월 11일. 그러나 칼텍스배 결승5번기에서는, 나흘 후인 15일 조한승 9단을 3승 1패로 물리치며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게 심기일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인지, 이전에 심기일전의 계기가 있어 국내 양대 기전에서부터 발동을 건 것인지, 그 선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원성진은 달라지고 있었다. 입단 때부터 별명이 ‘원펀치’. 원펀치가 뜻하는 건 공격, 힘, 파괴력, 그런 것인데, 이제는 거기에 계산력이 가미되고 있었다.
숨을 고른 후 올해 제15회 LG배 세계대회에 들어가 8강에 진출, 과거에 비해 한 걸음 나아갔다. 그리고 이번에 마침내 정상을 밟았다. 제1국은 통쾌한 불계승. 원성진이 백이었다. 집으로 조금 부족한 듯하다고 여겨지자 흑을 끊었고, 끊어진 흑돌이 달아나자 쫓아갔다. 흑돌은 대마가 되었다. 잡힐 말이 아니었다. 구리도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쌍점 한 발로 원성진은 구리의 대마를 함몰시켰다. 원펀치가 자신의 본령을 100% 발휘한 명국이었다.
제2국은 백을 든 구리의 승리. 피차 백으로 1승 1패한 것. 2국에서도 종반에 원성진은 1국에서처럼 백 대마를 향해 필살기를 들이댔으나 이번에는 불발이었다. 초읽기에 몰린 탓이 컸다. 제3국은 업그레이드 원성진, 끝내기의 승리였다.
<1도>가 3국의 종반 모습이다. 원성진이 흑이다. 덤이 나오느냐 마느냐, 미세한 형국인데, 검토실에 따르면 구리의 백1이 패착이었고, 원성진의 흑2가 승착이었다. 백1은 흑A로 이을 것을 기대한 것이나 순간의 방심이었고, 원성진은 찰나를 비집고 결정타를 날린 것.
<2도> 백1~흑5에서 <3도> 백3까지 필연의 수순으로 일단락인데, 백이 손해를 보았다는 것. 흑은 A로 끊어잡는 부수입도 남았다. 백이 먼저 A에 이으면? 선수 비슷한 것 아닌가. 맞다. 그러나 백A면 ….
<4도> 백1이면 흑2로 따내는 게 거꾸로 선수다. 왜냐 하면, 백이 이곳에서 손을 빼면 <5도> 흑1~5로 선수 빅을 만드는 수가 있는 것. 참고로 <1도> 백1 때 흑2로….
<6도> 흑1로 가는 것은 안 된다. 백2를 기다려 흑3으로 단수치면 백이 곤란할 것 같지만, 백4, 6의 선수와 8, 10으로 여기 집이 생긴다. 백6 때 흑7로 받지 않으면 백7로 젖혀 흑▲들이 떨어진다.
결론은 <1도> 백1로는 <6도> 백8 자리를 먼저 결정하고 가야 했다는 것. 구리 9단은 <1도> 백1로 흑A와 교환한 후 <6도> 8로 가도 마찬가지라고 본 것이었으나, <6도> 백8과 흑9를 먼저 교환하는 것은 속수 냄새가 나니까, 원성진 9단은 바로 자신들, 프로들의 맹점을 찔러 상금 2억 원을 거머쥐었다. 이제 원성진은 최철한 박영훈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 기세라면 추월할지도 모르겠다.
조남철 선생으로부터 이세돌 9단, 최철한 박영훈 원성진 김지석 박정환에 이어 최신예 나현 초단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아버지에 의해 바둑의 길로 들어왔다. 한 사람 서봉수 9단만 예외다.
특히 원성진의 아버지 원익선 씨는 바둑을 좋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바둑 교육에 동참해 1990년대 초반 이창호 열풍으로 전국에 바둑교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며 번창할 때 바둑 교육을 시작했던, 바둑교실 원장님 중에서도 고참 원장님. 원장님의 꿈이 세계제패로 열매 맺은 것을 축하한다.
엊그제 박정상 9단과 결혼식을 올린 김려원, 올해 아마추어 지지옥션배 6연승에 빛나는 김신영 등의 아버지도 바둑 사범님이거나 원장님이다. 이들의 꿈도 아울러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