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끼를 챙겨 먹기 어려웠던 시절 칼국수에 대한 기억 떠올려
김동연 지사는 익히 알려진 대로 흙수저 출신이다. 1957년 지금도 논밭투성인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김동연이 어린 시절 서울로 이주했다. 하지만 김동연이 11살 때 아버지가 타계하며 가세는 더 기울었다.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에서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았다.
그가 몇 차례 기고했던 칼럼에서 “세끼를 온전히 챙겨 먹기 어려웠던 시절, 끼니로 먹던 수제비, 외상 달고 됫박으로 사 온 쌀, 몇 장씩밖에 살 수 없던 연탄”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김 지사의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채석장에서 일했다. 매일같이 무거운 돌을 짊어졌고 시간이 나는 대로 산에 올라 나물을 캐 팔았다. 손에 잡히는 일은 가리지 않고 사남매를 위해 일했지만 가족은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았다.
판잣집마저 도시정비 사업으로 헐리면서 가족은 경기도 광주시로 쫓겨났다. 강제 이주다. 허허벌판 민둥산 흙바닥에서 가족들은 한동안 천막을 짓고 살았다. 비 오는 날엔 빗물이 천막 안으로 들이쳤고 바닥은 질퍽거렸다.
김 지사에 따르면 고등학교 1학년이던 어느 날 어머니는 쌀이 떨어져 가족들의 저녁으로 칼국수를 끓였다. 밀가루에 콩가루를 약간 섞어 오래도록 치댄 칼국수였다. 육수는 맹물에 간장뿐이었다. 그날 저녁을 먹고 공부하던 김동연이 한밤 중에 어머니에게 아까 먹다 남은 국수가 없냐고 물었지만 어머니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양이 충분하지 않아 자녀들에게는 국수를 주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국물로 배를 채웠던 것이다. 김동연은 이 일을 장성한 후에 어머니에게 들었다고 술회했다.
올해 여든 일곱인 김 지사의 어머니는 늘 20kg 쌀을 사서 쌀독에 붓는다. 김 지사가 “그것도 한참 드실 텐데 10kg을 사시지 그러냐”고 하자 어머니는 “쌀독이 비어있으면 너희 어렸을 때 힘들었던 생각이 나서 싫다. 절반쯤 남아있으면 사서 부어놓는다”고 답하셨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밥 한 그릇 편히 줄 수 없었던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화다.
이런 김 지사에게 어린이들의 결식은 견뎌내기 힘든 아픔이었을 거란 해석이다. 가족들의 끈끈한 정과 유대로 버텨내던 과거의 자신과 달리 지금의 저소득, 한부모가정, 장애인 등 취약계층의 아이들이 끼니를 거르며 희망마저 잃어가는 처지를 두고 볼 수 없었을 거란 얘기다. 그래서 “아이들이 끼니를 걱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 속에서 김동연의 심정을 어렴풋이 읽을 수 있다.
미래세대를 향한 김동연의 관심은 급식비 인상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절망에 빠진 청년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기 위해 애썼다.
아주대학교 총장이던 시절 김동연은 대학 서열, 취업률 증가보다 학생들에게 도전 정신,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심어주려 했다. 학생들이 스스로 목표를 짜고 수행하면 정규학점을 인정해주는 ‘파란 학기제’가 김동연의 손에서 시작됐다. 지도교수가 지시하는 수동적인 커리큘럼에서 벗어나 도전하고 성취하는 방법을 학생들이 찾기 바랐다. 파란 학기제는 언론을 통해 퍼졌고 여러 대학에서 벤치마킹하는 성과를 거둔다.
무엇보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학업 중단 위기에 놓인 학생을 위한 ‘아주 희망 SOS’ 시스템은 김동연이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는 어른이 아니란 것을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김동연은 자신 월급의 상당 부분을 꾸준히 기부하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중단해선 안 된다고 학생들을 설득했다.
김동연은 청년들에게 한 번도 “나도 젊을 때 힘들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지금 청년들은 그보다 훨씬 힘들다. 나 때는 상고를 졸업해 은행이라도 갔지만 지금 청년들의 고민은 단순히 취업과 진로 문제에 국한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청년들을 위로하고 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김동연은 ‘총장님’, ‘장관님’이 아닌 희망의 증거로 통한다. 흔한 말로, 가벼운 위로로 격려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동연 경기지사는 8월 15일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오랜만에 산책에 나서 모두부와 순두부를 샀습니다. 마침 가게에 콩 칼국수가 눈에 띄어 반가운 마음에 집어 들었습니다. 어려운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고향 생각이 절로 납니다”라며 자신이 산 두부와 칼국수를 올렸다.
김창의 경인본부 기자 ilyo2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