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성 제거로 매출 및 시장 영향력 확대 포석…“대주주 지배력 확대 수순” 의심도
이처럼, 식품·유통업계에서 합병 움직임이 활발한 이유는 기업 입장에선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매출 및 시장에서의 영향력 증대 등을 위함이라는 게 일반적 견해다. 이에 더해 전문가들은 ‘빅블러’(Big Blur) 현상으로 분석한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존에 존재했던 것들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현상으로 업종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한편에서는 이 같은 인수합병의 이유가 영업효율성과 지배구조개선이라는 대의가 아닌 대주주의 지배력 확대를 위한 것은 아닌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회사 합병 결정을 공시한 건수는 114건이다. 작년에는 89건, 2020년, 2019년 모두 69건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늘었다.
식품·유통업계의 대표적 합병 사례는 롯데제과와 롯데푸드다. 롯데제과와 롯데푸드의 합병은 롯데제과가 존속법인으로 롯데푸드를 흡수합병하는 구조로 이뤄졌다. 롯데제과는 합병을 통해 각자의 빙과 조직을 통합해 통합법인의 빙과 시장 점유율은 약 45.2%로 단숨에 1위로 올라섰다. 업계에서는 소비재 중심(B2C)인 롯데제과와 유지·식자재를 판매하는 중간재 기업(B2B)인 롯데푸드가 시너지 효과를 낼 것으로 보고 있다. 롯데는 각자의 이커머스 조직도 통합해 현재 10% 미만인 온라인 매출 비중을 오는 2025년까지 25% 이상으로 늘린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오뚜기는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오뚜기라면지주와 오뚜기물류서비스지주를 흡수합병한다. 이를 통해 핵심 원재료의 안정적 조달과 공급망의 효율적 관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오뚜기는 2017년 오뚜기삼화식품, 2018년 상미식품지주·풍림피앤피지주, 2020년 오뚜기제유지주·오뚜기에스에프지주 등을 흡수합병했다.
2017년 이후 함 회장은 매년 3월 기준으로 오뚜기 주식을 매각해 상속세를 마련했다. 올해 3월 28일에는 오뚜기 주식 7만 3000주를 오뚜기라면지주에 386억 3160만 원을 받고 매각하며 1500억 원가량의 상속세를 완납했다. 함 회장의 이 지분 매각으로 오뚜기와 오뚜기라면지주는 상호출자 관계가 됐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번 흡수합병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동원그룹은 지배구조를 단순화해 경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지주회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와 중간 지배회사 역할을 하고 있는 동원산업의 합병을 추진한다고 지난 4월 밝혔다. 합병 작업이 마무리되면 지주회사였던 동원엔터프라이즈가 동원산업에 흡수돼 동원산업이 동원그룹의 사업지주회사가 된다. 또 스타키스트, 동원로엑스 등 손자회사였던 계열사들은 자회사로 지위가 바뀌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산정한 합병 비율로 인해 주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당시 동원산업은 시가에 근거해 양사 간 합병 비율을 1 대 3.84로, 동원산업의 합병가액은 24만 8961원으로 각각 결정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소액주주들 사이에서 동원그룹이 동원산업 지분가치를 과소평가해 오너 일가에 유리하도록 합병 비율을 산정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결국 이들의 요구를 수용, 동원그룹은 자산 가치에 근거해 합병 비율과 합병가액을 각각 1.27, 38만 2140원으로 조정했다.
프레시지는 올해 닥터키친, 허닭, (주)라인물류시스템, 테이스티나인 등을 인수, 상품 포트폴리오 및 시장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현재 프레시지는 국내 밀키트 시장 점유율 60%의 압도적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한편으론 영업손실이 매년 늘고 있기도 하다. 영업손실은 2019년 149억 원에서 2020년 461억 원, 지난해엔 466억 원으로 매해 증가하고 있다. 여러 건의 인수합병으로 취급 상품이 급격히 늘자 대대적인 자사몰 개편이 불가피해졌고, 동시에 새벽배송 서비스를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유통업계의 흐름이 4차 산업혁명시대의 당연한 흐름이라는 입장이다. 유통업계 뿐 아니라 전 산업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쿠팡이 바로 ‘빅블러’ 현상의 대표적 기업”이라며 “제조와 유통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과거의 산업 바운더리가 더 이상 무의미해진 시대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과거처럼 특정 산업 영역에 특화된 경영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또한 주 소비층도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로 변했기 때문에 미래를 담을 수 있는 미래 지향성, 전략적 유연성을 가지고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에서는 인수합병 과정에서 효율성과 지배구조 투명성 제고라는 대의를 잃은 인수합병 작업은 시장의 불신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오뚜기라면지주와 물류서비스지주의 합병은 지배구조 개선의 측면에서 긍정적 면이 있었다. 하지만 동원산업과 동원엔터프라이즈는 합병비율에 문제가 있었다”며 “상장사 간 합병은 시가로 결정되기 때문에 대주주가 자신의 지배력 확대를 위해 일반주주의 권리를 침해하는 타이밍 혹은 시가를 선택한 게 아닌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를 제외한 전 세계 모든 나라는 합병비율을 공정가액으로 결정한다”며 “물론 시가가 공정가액으로 추정되지만, 특수한 상황에서 대주주가 일반주주의 권리를 침해하는지 감시·감독하는 차원에서는 반드시 공정가액으로 입법이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정아 기자 ja.k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