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로 임용되어 일을 하던 그는 판사를 그만두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로펌에 스카우트되어 고액연봉을 받으면서 변호사 생활을 했다. 그렇게 20년 넘게 법조인으로 생활해오던 그는 점점 자신이 진실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늦깎이로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해 영화 공부를 했다.
영화 공부를 하면서 그는 과감하게, 무모하게, 아니 용기 있게 변호사 일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이 소식을 듣게 되면 이구동성으로 “아니 왜 판사를 마다하시고, 아니 왜 그 좋은 변호사를 그만두시고 미래도 불투명하고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영화 일을, 드라마 일을 하려고 하시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고 싶어서요.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진정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요”라는 짧은 대답을 한 뒤 주제를 돌렸다.
그와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의 넘치는 에너지를 느낀다. 그의 현재 수입은 법조인으로 일할 때의 반의 반도 안 되지만 그는 지금이 가장 편안하다고 한다.
영화 일을 10년 넘게 한 후배가 어느 날 찾아와서는 “형 저 이제 영화 그만 하려고요”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누구보다도 영화에 열정적이었고 열심히 했던 후배였기에 영화 일을 그만두려고 한다는 후배의 말은 마치 해머로 머리를 얻어 맞은 것처럼 충격이었다.
난 그날 약속도 뒤로 미루고 그 후배와 술잔을 기울였다.
“너 혹시 점점 감독 데뷔도 미뤄지고 감독으로 데뷔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어서, 미래가 너무나 불투명해서 그만두는 거 아니니? 너 혹시 지금 그만둔 것 평생 후회하면서 살지 않겠니? 좀 더 신중히 고민해봐야 하는 것 아니니?”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후배는 술잔이 오고가고 시간이 흐르자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형, 지금 이 순간도 앞으로도 영원히 영화는 제 인생만큼 사랑해요. 근데 형, 제가 얼마 전부터 캠핑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는데 제가 요리를 잘하는 거예요. 제가 만든 두루치기, 생선조림, 파스타를 같이 캠핑 간 사람은 물론 생면부지 옆 텐트 사람들도 너무나 맛있게 먹는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요리를 맛나게 먹는 걸 보니까 제가 너무 황홀하리만치 행복한 감정을 느꼈어요. 그래서 전 아예 조그만 음식점을 하려고 해요.”
그 말을 하는 후배의 표정은 지난 10년간 보지 못했던 정말로 행복한 얼굴 그 자체였다.
대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내게 ROTC(학생군사교육단)에 입단하라고 강요했다. ROTC로 대학생활을 마치고 장교로 임관한 뒤 무사히 전역하고 농협에 들어가라고 날마다 말씀하셨다.
평생 골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정장을 하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집안의 어떤 행사에도 평소엔 입으실 수 없는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모래와 자갈을 판매하는 아버지의 일상복이 정장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당신의 큰아들이 안정적인 금융인이 돼 매일매일 정장을 하고 출근하는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었다. 결국 ROTC 입단도 안했고 사병으로 병역을 마치고 영화판에 뛰어 들었다. 처음에 아버지는 실망이 너무 크셔서 나를 차갑게 대하셨으나 지금은 내가 제작한 영화가 개봉할 때쯤이면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홍보맨으로 뛰어주신다.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직장인들 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의 종류와 상관없이 선택받은 사람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따로 있지만 생활을 위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현재 일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가 있음에도 수입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간 쌓아온 자신의 지위 때문에 못하는 경우도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자세히 살펴보면 할 수 있는데도 용기가 없어서 미래가 불안해서, 평생 미련을 가지고 후회하면서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무책임하고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라고 말하는 이도 많겠지만 나와 같이 일하는 판사 출신 감독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한 번뿐인 인생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거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동연 영화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