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비핵화 후 지원에 “10년 전 이명박 정책 베껴” 비난…문 대통령엔 분노, 윤 대통령엔 조롱 보내
“북한이 핵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그 단계에 맞춰 북한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구상을 지금 이 자리에서 제안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 관련 키워드는 국내외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윤석열 대통령은 ‘담대한 구상’이라는 키워드를 제안했다. 국어사전은 ‘담대하다’의 뜻을 겁이 없고 배짱이 두둑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겁이 없고 배짱이 두둑한 구상’의 선결 조건으로 비핵화를 강조했다. 북한의 비핵화가 이뤄진다면, 6가지 세부 분야에 대한 대북협력 및 지원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6가지 분야로는 대규모 식량 공급 프로그램, 발전·송배전 인프라 지원, 국제 교역을 위한 항만·공항 현대화 프로젝트, 북한 농업 생산성 제고 차원 기술 지원 프로그램, 병원 및 의료 인프라 현대화 지원, 국제투자 및 금융 지원 프로그램이 언급됐다. 비핵화가 이뤄진다면 북한이 먹고사는 문제뿐 아니라 국가 시스템 전반을 현대화하는 데 지원을 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한 대북 소식통은 윤 대통령이 담대한 구상을 발표한 뒤 이뤄진 통화에서 “북한이 이 구상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면서 “한반도 비핵화 이슈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도돌이표 속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많이 나오지 않나. 돈가방과 물품을 바꾸는 데 돈을 먼저 주는지, 물품을 먼저 건네받는지를 결정하지 못해 총격전이 벌어지는 장면 말이다. 남과 북이 처한 상황이 이와 같다. 비핵화라는 것은 북한 지도부가 권력 수호를 위해 쌓아 올린 공든 탑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일이거니와, 비핵화에 합의한다고 해도 북한이 실질적인 비핵화에 돌입할 가능성은 적다. 한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에선 비핵화가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제적인 지원부터 할 수 없다. 경제적 지원이 먼저 이뤄진다면 호구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한 북한 전문가는 “담대한 구상이라는 키워드 자체에는 무게감이 있어 보이지만, 성사될 가능성은 희미한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박근혜 정부의 ‘통일 대박론(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과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역시 개성공단 폐쇄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발이라는 결말을 맞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이 전문가는 “비핵화에 돌입한다면 한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북한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겠다는 의미인데, 핵개발 초기 과정이 아닌 지금에서는 북한이 받아들일 리 만무한 구상이기도 하다”면서 “윤 대통령이 형식적이고 의례적이면서도 상당히 교과서적인 구상을 내놨으나 실효성에 의문부호가 붙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 경축사 이후 북한은 ‘김여정 담화문’을 통해 담대한 구상에 대한 입장을 내놨다. 2020년 3월부터 김여정은 줄곧 담화문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누적해 왔다. 김여정 대남 담화문은 주로 한국 정부에 대한 적대적 스탠스를 취해 왔다. 8월 19일 김여정 담화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목부터 ‘허망한 꿈을 꾸지 말라’였다. 김여정은 “담대한 구상 그 허망성을 한마디로 대답해 주겠다”면서 말폭탄 포문을 열었다.
“담대한 구상이라는 것은 검푸른 대양을 말려 뽕밭을 만들어보겠다는 것만큼이나 실현과 동떨어진 어리석음의 극치다. 담대한 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명박 역도가 내들었다가 세인의 주목을 받기는커녕 동족대결 산물로 버림받은 ‘비핵·개방·3000’ 복사판에 불과하다. 역사의 오물통에 처박힌 대북정책을 베껴 놓은 것도 가관이지만, 거기에 제 식대로 ‘담대하다’는 표현까지 붙여놓은 것을 보면 진짜 바보스럽기 짝이 없다.”
김여정은 “북이 비핵화 조치를 취한다면이라는 가정부터가 잘못된 전제”라면서 “우리 국체인 핵을 경제협력과 같은 물건짝과 바꿔보겠다는 발상이 윤석열의 푸르청정한 꿈이고 희망이고 구상이라고 하니 정말 천진스럽고 아직은 어리긴 어리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1988년 생으로 알려진 김여정이 1960년 생 윤 대통령을 향해 도발적인 언사를 쏟아냈다. 담대한 구상에 대한 강력한 거부 의사를 표현하는 일환인 것으로 풀이된다.
김여정은 “오늘은 담대한 구상을 운운하고 내일은 북침전쟁연습(한미연합훈련)을 강행하는 파렴치한이 다름 아닌 윤석열”이라면서 “제발 좀 서로 의식하지 말며 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고 했다.
비핵·개방 3000구상은 2008년 발표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다. 북한이 비핵화에 돌입하면 경제개방을 돕고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남북관계 정상화, 비핵화, 북한 개방 및 정상화, 북한 경제자립화, 남북경제공동체를 구현하는 순차적인 과정을 통해 통일 기반을 조성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이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핵폐기 이후 본격적인 경제개발 단계에서 5대 분야에 대한 포괄적 패키지 지원을 구상했다. 경제·교육·재정·인프라·복지 등 분야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담대한 구상 역시 비핵화를 전제로 6가지 분야에 대한 지원 방안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인 ‘선 비핵화 후 지원’ 기조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이명박 정부 이후 박근혜 정부 대북정책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선 대화 후 비핵화 스탠스를 취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종전선언을 기반으로 남북 간 적대적 긴장과 전쟁 위협을 없애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전쟁 위협을 없앤 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를 정착하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목표였다.
앞서의 대북 소식통은 “‘선 비핵화 후 지원’ 기조는 사실상 북한에 자본시장을 자연스럽게 유입시키겠다는 정책이기 때문에 북한의 역린을 건드릴 수 있는 부분”이라면서 “박근혜 정부가 강조한 신뢰와 문재인 정부 키워드인 평화도 결국엔 핵을 포기할 만큼 북한 지도부 구미를 당기지 못한 셈”이라고 했다.
이 소식통은 “북한 입장에서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은 한국 대북정책이 다시 이명박 정부 당시 정책으로 회귀하는 것”이라면서 “북한 지도부가 10년 전으로 회귀한 정책 기조에 실망하면서 원색적인 비난과 함께 그냥 서로 신경 쓰지 말고 살자는 김여정 담화문이 나온 것으로 본다”고 했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김여정 담화문에서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고 했다. 김여정 담화문 중 “한때 그 무슨 운전자를 자처하며 뭇사람들에게 의아를 선사하던 사람이 사라져버리니 이제는 절대 짝지지 않는 제멋에 사는 사람이 또 하나 나타나 권좌에 올라앉았다”는 부분이었다.
그는 “이 대목을 보면 김여정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가 문재인 대통령에 분노를 표현한 데 이어 윤석열 대통령에겐 비웃음 섞인 조롱을 하고 있다는 점을 캐치할 수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북한이 원하는 부분을 최대한 실행에 옮기려 노력하던 과정에서 남북관계 급랭을 맞이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이 원하는 것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여 주지 않는 이상 북한을 만족시킬 방법은 사실상 없는 셈이다.”
그는 “북한과 대화 테이블을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데엔 문재인 정부 안이 효과적일 수 있지만, 국제적인 공감대와 공조체계를 구축하는 데에 있어선 윤석열 정부 안이 유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