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향한 질주 멈출 수 없었다
▲ 내 이름은 ‘빅토르 안’. 토리노 동계올림픽 3관왕 안현수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해 화제가 되고 있다. 사진출처=러시아 빙상연맹 |
―지난 8월 러시아 국적 신청을 선언한 후 4개월 만에 국적 변경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만감이 교차할 것 같다.
▲사실 러시아에 올 때만 해도 귀화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여기서 생활하면서 천천히 결정하려고 했는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정말 많이 고민했다.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동안 번민에 빠져 헤매기도 했다. 이제 뒤돌아볼 수가 없다. 결정은 했고, 귀화 신청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난 러시아인으로 선수 생활을 해야 한다.
▲ 러시아에서 훈련 중인 안현수. 사진출처=러시아 빙상연맹 |
▲충분히 이해한다. 국적 변경이 소속팀 바꾸듯이 쉽게 결정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나 또한 내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는 게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안현수가 스케이트 타는 걸 좋아해주고 응원해주는 팬들을 위해서, 그리고 내 자신을 위해서 선택한 결정이다. 날 비난하고 손가락질하는 분들의 시선은 애써 피하고 싶다. 내가 어떤 국적을 다느냐보단 내 스케이트를 좋아해주는 분들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볼 생각이다.
―러시아로 건너간 지 6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어떻게 생활했는지 궁금하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6개월이 지난 것 같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생활한 시간보다 전지훈련하러 외국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이탈리아에선 4주나 있었다. 훈련보다는 물리치료를 많이 받았다. 러시아 대표로 합류하기 위해 필요한 절차들도 많았다. 메디컬 테스트도 받았고 시민권 때문에 간단한 인터뷰도 했고, 러시아에 정착하기 위한 여러 과정들을 겪으며 보낸 것 같다.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인가?
▲모스크바 인근 노보고르스크 빙상 훈련 캠프다. 한국으로 말하면 태릉선수촌 같은 곳이다. 처음에 와선 선수들과 함께 3인실, 2인실에서 지냈는데 알렉세이 크라프초프 러시아 빙상연맹 회장님께서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놀라시더라. 1인실에서 지내는 줄 아셨다면서. 그때부터 1인실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여기선 빨래하는 게 불편하다. 링크장에는 세탁기가 있는데 링크장까지 가기 귀찮아서 숙소에서 손빨래한다. 워낙 실내온도가 높아서 빨래를 널어놓은 게 자연 가습기 역할을 하고 있다(웃음).
안현수는 3인실이나 2인실을 사용했을 때, 자신보다는 다른 선수들이 더 불편해 하는 걸 느꼈다고 한다. 안현수의 짐이 많다 보니 공간이 비좁고 부족했던 것. 러시아 선수들의 짐은 단출하지만 안현수는 한국에서 가지고 간 짐들이 많아 오히려 안현수가 더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1인실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런 고민은 덜게 됐다. 선수들이 1인실을 쓰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라고 하는데, 안현수에게 공을 들이는 러시아 빙상연맹의 마음 씀씀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러시아 선수들의 반응이나 태도는 어떠한가. 경계를 한다거나 차별을 당하는 일은 없었나?
▲처음엔 선수들이 귀화까진 생각 못하고 단순히 훈련하러 온 줄로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 전지훈련 때 내가 귀화 신청했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선수들이 인터넷을 통해 그 뉴스를 접한 후부턴 조금씩 호의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통역하는 분이 계셔서 선수들과 생활하는 데 큰 불편한 점은 없다. 요즘은 러시아어를 배우기 위해 따로 수업도 받고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스마트폰으로 공부도 한다. 점차 학습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 같다.
―한동안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 국적 변경에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는 노력들이 자신을 많이 힘들게 했을 텐데.
▲아무래도 감정의 변화들은 있었다. 말도 잘 안 통하고, 체력적으로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보니 나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스트레스가 많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나름 각오도 했고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다.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내가 러시아어를 배울 생각이나 했을까? 새로운 도전이 나한테는 더 좋은 결과물을 안겨줄 것이라고 믿는다.
▲ 러시아 입국 후 첫 기자회견. 사진출처=러시아 빙상연맹 |
▲아무래도 선수들 마인드가 한국 선수들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한국은 코치나 감독님이 시키는 일은 무조건 “예”하며 받아들였다. 아파도, 힘들어도, 참고 해야 하는 문화였다. 그러나 여기는 선수들이 스스로 포기하는 일들이 많다. 몸이 안 좋으면 선수도, 코치도 운동하지 않고 쉬는 걸 당연시한다. 만약 그걸 어기면 의사가 나서서 관여한다. 한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다. 훈련 방법이 자율적이고, 선수들마다 개인 능력들이 다르니까 훈련 소화 여부도 선수들 자율에 맡긴다. 아마 한국 코치 선생님들이 계셨을 때 그런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선수들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던 부분이다. 지난 10월, 장권옥 총감독과 최광복 코치, 마사지 전문가 김지호 씨 등이 러시아 빙상연맹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고 러시아를 떠났다. 혼자 남은 안현수 선수에 대해 우려의 시선이 많았는데, 괜찮았나?
▲난 장 감독님이 뽑은 선수가 아니라 연맹 회장님과 직접 접촉해서 대표팀에 합류를 했기 때문에 별다른 영향을 받진 않았다. 한국인 감독님과 코치님이 계신다고 해서 내가 그분들과 한국어로 대화를 하면 그 또한 이상한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들도, 나도 서로 선수와 지도자의 관계로 다가가려고 애썼다. 마음적으로 의지가 되는 부분은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러시아연맹과 안 좋은 감정으로 헤어진 부분은 많이 안타깝고 속상하다. 그러나 지금은 올림픽에만 집중해야 할 때다. 큰 목표를 앞두고 체력을 끌어올려야 하기 때문에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다.
―러시아에서 메디컬 테스트를 받고 나서 심장에 문제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들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여기서 심전도 검사를 받았는데 내 심장이 불규칙하게 뛴다면서 많은 검사를 받게 했다. 한국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여기선 심장 박동수에 문제가 있다고 하니까 슬며시 걱정이 되기 시작하더라. 러시아에선 몸에 이상이 있는 게 발견될 경우 운동을 못하게 하고 지원을 끊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된다면 큰 일이었다. 러시아로 귀화까지 하면서 스케이트를 타려고 왔는데, 아예 운동을 못하게 된다면, 내 인생이 틀어지는 일 아닌가.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려고 잼, 초콜릿, 빵, 케익, 계란 노른자 등을 먹지 않고 버티다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 콜레스테롤 수치 낮추려다 다른 데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약을 먹으며 조절하는 중이다.
―손연재 선수랑 같은 숙소를 쓰고 있는 게 사실인가?
▲숙소 건물은 다르고 숙소들이 가깝게 위치해 있는 건 맞다. 식당에서 몇 차례 마주친 적은 있었다. 나이 상으로 내가 오빠이니까 먼저 아는 척을 했어야 하는데, 쑥스러워서 인사를 못 건네다가 연재가 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 안 가느냐’면서. 난 힘들 것 같다고 했더니 자신은 한국에서 연말을 보내고 1월 초에 들어올 것 같다며 인사를 하더라. 연재는 체중 조절 때문인지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1월 초에 들어오면 기회가 될 때 같이 식사도 하고 대화도 나눌 생각이다.
안현수는 모스크바의 물가가 굉장히 비싸다고 혀를 내둘렀다. 옷, 신발, 전자제품 가격이 한국보다 훨씬 비싸 쇼핑은 엄두도 못 낸다고 한다. 요즘은 지하철 타고 다니면서 모스크바 곳곳을 구경하러 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단다.
―훈련은 어느 정도 소화하고 있나? 무릎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라고 들었다.
▲러시아 들어온 이후 계속 무릎 검사를 받았다. 이전에 재활했던 아킬레스건 검사도 다시 했다. 그때 약간의 문제가 있어서 9월에 진행된 미국 전지훈련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대표팀에서 전훈 참가보다는 남아서 치료를 받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권유했고, 선선히 응했다. 약 한 달가량 스케이트를 타지 않았던 것 같다. 재활훈련만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러다보니 감각이나 경험면에서 많이 뒤처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 당장 시합 출전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대회 출전이 가능한 건가.
▲아마도 1월 말에 열리는 유럽 챔피언전은 힘들지 않을까 싶다. 2월 러시아에서 월드컵 5차예선전이 열리는데 그때 가봐야 출전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꾸 스케이트를 타야 한다. 어느 정도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몸으로 끌어올려놔야 경기 출전에 대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 있는 선수들과는 자주 연락하는 편인가.
▲전화 연결 상태도 그렇고, 요금도 많이 나오는 편이라 자주 연락하지는 못한다. 대신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갔다가 러시아 선수들을 만나면 내 안부를 많이 물어본다고 하더라. 언제부터 게임을 뛸 수 있느냐며 러시아 선수들을 통해 인사를 전해오기도 한다. 한국 선수들은 게임 능력이나 경험면에서 월등한 실력을 갖고 있다. 이호석, 노진규, 곽윤기 등 상대하기 쉬운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 앞으로는 그들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데, 정말 큰일이다(웃음). 망신은 당하고 싶지 않은데, 내 몸이 잘 만들어질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새해 소망을 묻는다면?
▲정말로 다사다난했던 2011년이 지나갔다. 새해에는 러시아 국기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해야 하기 때문에 어느 해보다 준비를 잘해야 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처음 대표팀 들어가서 생활하는 기분으로 지내고 있다. 올 시즌 성적을 내기보다는 모든 걸 올림픽에 맞춘 터라 시합 출전을 통해 시행착오를 겪으며 몸을 끌어올리는 게 더 큰 목표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부상 없는 한 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무릎을 다치고 나니까 통증 없이 운동을 하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이 악물고 올 한 해 잘 버텨내면 2년 남은 올림픽대회에선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안현수는 1월 러시아 여권을 받는 대로 한국에 국적 말소 신청서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국적이 바뀌었다고 제가 러시아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라고 말한다. 서류상으로만 러시아인이 된 거지, 한국인 안현수는 영원히 변치 않는 사실임을 강조한다. 여전히 인터넷에선 그의 국적 변경을 두고 찬반양론이 뜨겁다. 그러나 안현수가 국적을 바꿔서라도 스케이트를 타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를 한국이 아닌 러시아로까지 내몬 빙상연맹 관계자들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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