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부처가 지면 내가 왜 우울할까’
▲ 이창호 9단 |
이창호 9단이 요 며칠 사이에 이세돌 9단에게 거푸 졌다. 지난 연말(12월 22일)에는 ‘2011올레배’에서 졌다. 결승5번기의 제4국이었는데, 반집 차이로 이세돌 9단이 타이틀과 1억 원의 상금을 가져갔다. 올레배는 국내에서는 제일 큰 두 기전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 반집은 뼈저리다. 아쉬움이 오래 남는다. 신나게 싸우기라도 했으면 설령 대마가 잡혀 만방으로 지더라도 쉽게 포기가 되지만, 하필 반집이 뭔가. 실재하지도 않는 건데. 실재하지 않는 그 반집에 상흔이 남는다.
이창호 9단이 바둑에 지는 날은 그냥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시무룩한 얼굴로 ‘쯧!’ 소리를 냈다. 뭐, 할 수 없지. 그럴 때도 있는 거지. 그러면서 웃었다. 하긴 이창호 9단이 반집으로 울린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이창호 때문에 꿈과 날개를 접은 사람, 절반의 성공 정도로 그친 사람이 또 어디 하나둘인가 말이다.
조훈현 9단이나 서봉수 9단 같은 선배들이야 누릴 만큼 누린 후에 당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아니, 조훈현 9단을 끌어내린 것도 이창호의 반집이었긴 하지만, 또래나 후배 중에 동갑내기였던 최명훈 윤성현 김성룡 9단부터 시작해 한두 살 위인 김승준 이상훈 윤현석 9단, 몇 살 아래인 김명완 안조영 목진석 9단 등에 이르기까지 얼른 떠오르는 이름만도 열 손가락은 훌쩍 넘는다. 하나같이 이창호만 아니었더라면 타이틀 홀더가 되었을 준재들이다.
명민하고 반짝반짝해 크게 촉망받다가 지금은 미국에서 LA,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바둑 보급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김명완 9단이 해외보급으로 눈을 돌린 것도 “창호 형하고도 해 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는데, 막상 몇 번 붙어보니 벽을 느끼게 되었다. 승부로는 창호 형을 넘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김명완 9단의 이 고백이 또 어디 김 9단만의 토로이겠는가.
중국의 마샤오춘 9단이나 창하오 9단은 또 어떤가. 서봉수 9단이 “행마의 가벼움에서는 당대 제일”이라고 인정했던 마샤오춘 9단이나, 대륙의 풍모를 지닌 바둑이라는 평을 들었던 창하오 9단이나, 이창호 9단을 만나지만 않았더라면 일세를 풍미했을 사람들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반집으로 울렸으니 이제 그걸 당할 차례가 된 것 같다. 이창호가 지면 좀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창호의 패배가 아쉬워서 그러기도 하겠거니와, 일면 이런 인생의 부메랑을 확인하면서 잠시 숙연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긴 이창호 9단이 평소 성품은 정말 훌륭하지만, 우리보다 중국 사람들은 더해 이창호 9단을 보면 승부와 상관없이 ‘바둑의 신’처럼 떠받든다고 하지만, 바둑판에서는 사실은 무서운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다. 지금은 다 흘러간 일이지만, 20년 전쯤을 생각해보면 열서너 살이면 철부지가 천하의 조훈현 9단을, 그것도 스승을 사정없이 이기곤 했다. 더구나 낮에 스승의 타이틀을 빼앗고 저녁에 스승의 집으로 들어가 한 지붕 아래서 잤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단순히 철부지여서 그랬다고 보기엔 그 승패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엊그젠(1월 3일) 9단들만 출전하는 제13기 맥심커피배 16강전에서 이세돌 9단에게 중반에 무너졌다. 한두 번 지다 보면 자꾸 지게 된다. 이세돌 9단이 한국기원 랭킹 1위에 올라온 후에도 이창호 9단에게는 반반 정도였고, 중요한 대국에서는 많이 지기도 해서 “이창호 9단을 제압하지 못하는 한 완벽한 일인자로 보기는 어렵다”는 말도 듣고 있었는데, 바야흐로 그 고개를 넘어가기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오락가락하던 저울 눈금이 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느낌. 팽팽하던 팔씨름에서 한쪽이 기울기 시작하는 느낌.
이창호 9단이 득세한 지 20년. 이세돌 9단은 10년. 그 차이도 있고, 이창호 9단은 그동안 혹사하고 과로했다. 바둑판 바깥에서는 성질내고 싶을 때도 있었을 텐데, 이세돌 9단처럼 성질 한 번 낸 적이 없다. 맥심배의 대국을 되돌아본다.
<1도>는 맥심배에서 이창호 9단이 이세돌 9단에게 당하는 장면이다. 흑1로 찝은 사람이 이세돌 9단이다. 백△들 포도송이가 떨어졌다.
<2도>는 <1도> 이전의 실전진행. 흑1부터 우상 백 대마의 사활을 묻고 있다. 백2를 기다려 흑3을 선수하고 5로 젖히고, 7로 파호하고 9로 치중했다. 백 대마가 일단 궁도가 없다. 그러나 대마는 쉽게 죽지 않는 법.
<3도> 백1로 단수친 것이 비상구. 여기서 흑은 7 자리에 잇지 않고 중앙으로 돌아가 2로 젖혀 백3을 부른 후 4로 가만히 늘었고 이쪽 백 대마는 7로 살았다. 백7로 살자 흑 <1도> 1로 찝은 것. 백1 때 흑이 한 점을 이으면 어떻게 될까?
<4도> 흑1로 이으면 백4로 코붙이는 수가 있다. 백A는 선수. 백4에 흑B면 백C로, 흑C는 백B로 산다. <1도> 흑1 다음 백은 수가 없다.
<5도> 백1은 흑2~8로 돌돌말이(백5는 흑▲에 이음)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1도> 흑1 다음 백은….
<6도> 백1~7로 정리하고 흑8을 기다려 백9로 돌격, 승부수를 날렸는데, 통하지 않았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