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 지난 8월9일 이학수 부회장이 ‘안기부 X파일’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검 청사로 들어서고 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이 부회장 검찰 소환과 맞물려 ‘이학수 책임론’이 살짝 고개를 들었지만 곧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삼성의 총체적 난국을 타개할 조타수로 그만한 인물도 없다는 평이 뒤를 따랐다. 그러나 잠잠했던 이학수 부회장 거취문제에 대한 논란이 최근 삼성그룹 안팎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있다. 아직은 철옹성처럼 느껴지는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이학수 부회장 체제와 관련해 ‘포스트 이학수’론에 대한 관측마저 거론되는 실정이다.
일부 재계 인사들은 ‘삼성이 내년 초 사장단 인사를 단행할 것’이란 소문을 들먹이며 이학수 부회장 거취 문제에 따른 하마평을 늘어놓는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행 사건에 대한 법원의 유죄 판결이 삼성 이건희-이재용 부자 경영권 승계에 대한 사법적 부담을 안겨줬다는 점에서 고위 임원에 대한 책임론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삼성그룹 경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구조조정본부는 이학수 부회장이 장악하고 있다. 이건희-이재용 부자를 제외한 삼성그룹 내 책임·권한 측면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이 부회장이 있는 셈이다.
안기부 도청문건 파문이 처음 불거졌을 때만 해도 삼성 안팎에선 ‘홍석현은 버려도 이학수는 살린다’는 시각이 대세였다. 도청 문건에 등장한 삼성 이건희-홍석현-이학수 3인방 중 총수인 이건희 회장은 당연히 ‘열외’일 수밖에 없으며 총체적 난국을 타개할 적임자로 이학수 부회장만한 인물도 없다는 관점에서 홍석현 전 주미대사만이 홀로 희생양의 길을 걸을 것이란 전망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에버랜드 건 유죄판결 여파로 이재용 상무 지분 획득과정의 정당성이 크게 훼손되면서 ‘그룹 내에서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가 확산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동안 삼성 구조본을 주물러온 이학수 부회장과 차기 구조본 책임자로 하마평에 오르던 김인주 구조본 사장이 핵심이 되는 이학수-김인주 체제에 대한 책임론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이다.
사장단 인사에 대한 추측과 맞물려 그룹 안팎에 구조본 개편설이 나돌고 있다. 삼성 구조본은 재무팀 기획팀 홍보팀이 3개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데 재무팀 출신 이학수-김인주 체제가 그동안 구조본을 주물러 오면서 기획팀과 홍보팀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위축돼 왔다. 삼성자동차 사업에 적극적이었던 기획팀이 자동차 사업 실패 이후 이 사업에 부정적이던 재무팀의 위상에 눌려온 것은 재계에 널리 알려진 일.
▲ 이재용 상무(왼쪽), 이건희 회장 | ||
그러나 이 같은 권력 집중은 곧 이 부회장에게 ‘독배’로 작용할 수 있다는 평으로 이어진다. 미국 체류중인 이건희 회장의 최종결재를 받기 위해선 반드시 이학수 부회장의 ‘선(先) 결재’가 있어야 한다고 전해진다. 황태자이지만 아직 그룹 장악력 측면에선 이재용 상무가 이학수 부회장에 필적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건희 회장이 자리를 비운 삼성그룹은 현재 이학수 부회장 체제로 굴러간다고 봐도 무방한 셈.
이는 곧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아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관전평으로 발전해 내부 경계론으로 작용할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이미 삼성 안팎에선 ‘이건희-이재용 부자 외에 또다른 권력의 축이 생겼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이 부회장에 대한 ‘잠재적 경계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이건희-이재용 경영권 승계과정에서 이학수 부회장의 역할에 대한 추측도 여러 갈래로 퍼져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재용 상무가 경영권을 이어받게 되면 이건희 회장의 핵심측근들은 자연스레 물러나야 할 것”이라 전망한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과 김윤규 전 부회장 간의 경우처럼 선대 회장의 측근이 그룹 후계자와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해 자연스레 용퇴하는 것을 이건희 회장도 바랄 것이란 관전평이다.
이는 곧 ‘이재용 상무 체제 개막=이학수 부회장 용퇴’ 공식으로 이어진다. 이 부회장이 이건희-이재용 승계과정을 주관하고는 있지만 이 부회장에 대해선 ‘이건희 회장 사람이지 이재용 상무 사람은 아니다’란 평이 따라다닌다. 그러나 삼성 내 권력의 축으로 자리 잡은 이 부회장이 쉽사리 자리를 내줄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부호도 제기된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 일가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이학수 부회장이 자리 보존을 고집할 경우 이건희 회장도 곤혹스러울 것”이란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에버랜드 건 유죄판결로 이재용 상무의 지분확보 정당성이 훼손된 상황에서 경영권 승계과정에 과도체제가 필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SK그룹이 최태원 회장 선친인 최종현 회장에서 손길승 회장 체제로 넘어갔다가 최태원 회장 시대로 이어졌던 사례와 곧잘 비교된다. 건강 문제와 도덕적 비난이란 이중고를 겪고 있는 이건희 회장이 2선 후퇴를 전격단행하고 삼성이 과도체제로 돌입할 경우를 가정하면 현 시점에서 이학수 부회장이 그룹 경영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손길승 전 회장 이후 그룹경영권을 잡은 최태원 SK 회장이 그룹 장악력 한계에 부딪쳐 각종 내홍에 시달렸던 것을 상기해보면 이학수 부회장의 과도체제 수장 역할은 이재용 상무에게 지나치게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이와 관련, 삼성 안팎에선 한때 ‘황영기 과도체제론’이 나돌아 주목을 끌기도 했다. ‘포스트 이학수를 상정한 삼성 고위층이 황영기 우리은행장과 접촉했다’는 미확인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삼성 출신인 황 행장은 이건희 회장의 신임이 높았던 인물이며 지난해 3월 삼성증권 대표이사를 그만두고 우리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겨 최근 삼성 내 권력 이해관계와 비교적 무관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러나 과도체제를 상정한 ‘황영기 접촉설’에 대해 삼성측 인사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황영기 행장 외에도 그동안 이재용 상무 후견인 역할을 해온 윤종용 부회장이 과도체제 수장에 더 적합하다는 호사가들의 평이 나돌기도 했다. 아직 소문에 불과한 사안들이지만 이학수 부회장에 대한 일각의 책임론과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경영권 승계와 맞물려 여러 추측을 낳는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