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약이 무효할 땐 오른팔 내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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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부 도청 파문으로 인한 여론의 따가운 질책, 에버랜드 전환사채 건 유죄 판결에 이은 총수 일가 편법상속 논란, 검찰 고위인사에 대한 떡값 제공 파문, 그리고 최근 홍석현 전 주미대사 검찰조사까지 삼성을 향한 수사당국의 예봉과 각계의 차가운 시선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국감 증인 채택 시점과 맞물려 건강 문제를 이유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탄 이건희 회장은 석 달이 지나도록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다. 일년 내내 ‘삼성’ 이름이 등장하는 부정적인 정치 사회 뉴스가 언론에 이어지고 있는 것. 삼성이 뭔가 특단의 조치를 내놓을 시점이란 관전평이 계속해서 나오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삼성 주변에선 올 연말, 내년 초를 전후로 해서 몇가지 처방을 내놓을 것이란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다. 주요 고위임원에 대한 인사설과 연말 대국민 사과성명 준비설 등이 그 골자다. 이런 관측들이 현실화될 경우 삼성 구조조정본부 내 핵심인사 몇 명에 대한 책임론이 불가피할 것이란 지적이 따르고 있다. 과연 삼성 구조본 내부는 폭풍전야에 놓여있는 것일까.
삼성 구조본 안팎에서 따가운 시선을 가장 많이 받는 조직은 바로 법무실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사시 동기인 이종왕 법무실장을 사장급으로 영입하는 등 호화 법무진용을 갖췄지만 에버랜드 편법증여 사건 유죄 판결 등 각종 악재가 겹쳐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구조본 내 간부와 법무실 책임자 간의 ‘불협화음’이 밖으로 번져나가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최근 들어 삼성은 검찰 고위직에 대한 삼성의 떡값제공 파문과 홍석현 전 주미대사에 대한 검찰조사 등으로 어느 때보다 검찰에 대한 대처능력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종왕 실장 체제의 법무실에 대한 삼성 안팎의 비난여론은 법무실 조직 차원을 넘어 삼성그룹 수뇌부에 큰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이 같은 기류와 때를 맞춰 재계 일각엔 삼성그룹 수뇌부가 서울고검장 출신 A씨와 최근 접촉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물론 미확인 첩보 수준의 이야기지만 삼성의 A씨 접촉설은 이미 주요 대기업 정보팀의 보고내용으로 올라간 상태다.
A씨는 이종왕 실장보다 5년 앞선 사시 12회로 검찰 경력만 놓고 보면 이종왕 실장보다 훨씬 화려하다. 대검 중앙수사부장을 거쳐 서울고검장까지 올랐다. 이종왕 실장이 거친 검찰 최고위직이 대검 수사기획관이었던 것과 확연히 비교된다. 이종왕 실장은 지난 99년 12월 검찰복을 벗고 변호사 개업을 했지만 A씨는 몇년 전까지도 검찰조직에 몸을 담고 있었다. 최근의 검찰 수뇌부와 교감이 두터울 법하다.
삼성그룹의 A씨 접촉설을 둘러싼 재계의 시선은 삼성의 A씨 영입에 대한 예측으로 이어진다. 삼성의 A씨 영입을 가정해볼 경우 A씨는 당연히 이종왕 실장보다 높은 직책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이종왕 실장이 사장급인 만큼 그보다 높은 자리인 부회장급의 직책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구조본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학수 부회장과 ‘형식적으로’ 맞먹는 위치에 갈 수도 있는 셈이다. 이 같은 가정은 자연스레 이종왕 실장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삼성 구조본 내 대표적 고위인사인 B씨의 거취 문제도 재계 인사들이 유심히 지켜보는 대목이다. 안기부 도청 파문이 터져 나오고 삼성 에버랜드 건 유죄판결 등 사태가 이어지면서 B씨 책임론이 재계 전반에 확산돼 왔다.
삼성 구조본 내 고위 핵심인사로 분류되는 B씨 책임론에 대해 삼성그룹측 관계자는 “소설 같은 이야기”라 일축한다. 그러나 재계에 퍼진 B씨 책임론의 내용은 제법 구체적이다. B씨가 어떤 식으로 물러나게 되며 그 후임으로는 어떤 인사가 낙점 받았는지에 대한 내용도 재계 대기업 정보팀의 내부보고에 올라간 상태라고 한다.
재계에선 조만간 삼성그룹이 올 한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편법상속시비-불법정치 자금 제공’ 건의 마무리 작업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 그룹 차원에서 연말쯤 대국민 사과성명을 통해 국면전환을 시도할 것이란 소문이다.
삼성그룹 안팎에 퍼진 대규모 고위직 인사 소문도 사과성명 발표설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과성명이 나온다면 여론의 관심은 이건희-이재용 총수 일가에게 집중될 것이다. 과거 사카린 밀수사건 당시처럼 총수일가 일부 재산에 대한 ‘사회환원’ 같은 처방전이 이뤄질지 여부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이는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을 양대축으로 경영하고 있는 삼성의 경영 틀이 바뀌는 큰 변화가 올 가능성도 있다.
재계는 이런 ‘거창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더라도 최소한 인적쇄신론은 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경영권 2세승계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총수일가가 자신들이 모든 책임을 떠안는 형식을 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제하면 주요 고위직 인사들 중 일부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그동안 제기돼 온 구조본 주요 책임자들의 ‘책임론’이 현실화될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배경 탓이다.
삼성그룹 안팎에선 연말 혹은 연초에 각 계열사별로 엄청난 금액의 인센티브가 직원들에게 지급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삼성 주변에 나도는 ‘연말 사과성명→고위직 인사’ 소문은 대다수 삼성 직원들의 기를 살려주는 사이 ‘누군가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느낌을 던져준다.
과연 삼성 총수일가를 대신할 희생양이 등장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누가 그 ‘십자가’를 짊어지게 될 것인가에 재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