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47>
▲ 다법은 잊혀가는 아름다움이다. 거기에는 성급함도 얽히고설킴도 편가르기도 없다. 뉴시스 |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세상을 바꾼다고 한다.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카카오톡 등 SNS는 시민들의 관계망을 촘촘하게 만들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길을 걸으면서도, 공부를 하면서도, 심지어는 침실에서도 지인들과 재빨리 대화하고 정보를 공유한다. 최근에는 E-Book을 읽으면서 책을 읽는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서비스도 나왔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는 게 여러 사람에게 공개된다.
하지만 대화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고, 관계가 촘촘하다고 대화의 밀도까지 빽빽할까? 차 향기 그윽한 자리에서 홀로 상념에 젖거나, 벗과 나누는 한담(閑談)을, 네트워크는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구한말 초의선사(艸意禪師)는 다법(茶法)를 이렇게 내보였다.
정좌하여 차를 반이나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더라. 제때에 맞추어 끓여 마시는데 물은 흐르고 꽃은 피었더라.
초의선사는 또 이렇게 말했다.
따는 데 그 묘(妙)를 다하고, 만드는 데 그 정(精)을 다하고, 물은 진수(眞水)를 얻고, 끓임에 있어서 중정(中正)을 얻으면 체(體)와 신(神)이 서로 어울려 건실함과 신령함이 어우러진다. 이에 이르면 다도는 다하였다고 할 것이다.
▲ 2010년 G20 정상회의를 기념해 열린 초의선사 행다법 재현행사. 뉴시스 |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것은 신라 선덕여왕 시대(632~647년)였다. 삼국사기에는 “김대겸이 왕명을 받아 당나라에서 종자를 가져다 지리산 밑에 차밭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융성과 더불어 발전했다. 차를 관리하는 다방(茶房)이란 관직이 신설되고 다촌(茶村)까지 생겨났다. 이런 다법이 고려자기를 탄생시켰다는 설도 있다.
고려시대까지 성했던 차 풍속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술로 바뀌었다. 억불숭유정책 때문이다. 하지만 사찰을 중심으로 전통은 이어졌다. 그러다가 19세기 초 다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이 중심이 되어 다법을 되살리려 힘썼다. 특히 초의선사는 차를 재배하고 가공하는 법을 잘 정리했다.
▲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다법은 중국에서 들어와 일본에 전해졌지만 서로 다른 특색을 지녔다. 중국의 다법은 격식이 없다. 일본의 다법은 깔끔하지만 복잡하다. 우리나라의 다법은 격식은 갖추되 소탈하다.
차를 마실 때는 손님이 적은 것을 귀하게 여겼다. 그래서 혼자 마시는 것을 신(神), 손님이 둘일 경우를 승(勝)이라고 하였다. 손님이 많으면 시끄러워 우아한 정취를 느낄 수 없는 까닭이다.
차를 마시는 풍습은 주로 선가(仙家)에서 성행했다. 졸음을 쫓아주기도 했지만 다법과 선의 정신이 꼭 들어맞았기 때문이었다. 다선일미설(茶禪一味說)이 생겨나게 된 연유다. 고려시대 지눌선사는 “불법(佛法)은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곳에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 문인 이상적은 “찻잔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부처님의 수많은 화신(化身)”으로 보았다.
다시 초의선사의 다법을 쫓아가보자.
차란 그 성품이 속되지 않아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차의 더러움 없는 정기를 마실 때 어찌 대도(大道)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랴.
다법은 술과 SNS와 아메리카노에 쫓겨난 소중한 매체다. 거기에는 성급함도 없고, 얽히고설킴도, 웅성거림도 없고, 편 가르기도 없다. 잊혀가는 아름다움이자 지혜다. 만나지 못했던 정겨운 친구나, 가족, 동료에게 이제는 따뜻한 마음 한 잔 건네시길.
끽다거(喫茶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