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서민이 지금 정치권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정치인들이 서민에게 이처럼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단군 이래 처음이 아닌가 싶다.
민주당이 노무현 후보의 서민적 이미지를 무기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귀족적 이미지를 공격, 대선구도를 ‘서민 대 귀족’으로 끌고 가면서 ‘서민쟁탈전’은 시작됐다.
이에 질세라 이 후보는 “나도 한때는 서민이었다”며 각종 서민이벤트를 엮어나가면서 연일 웃지 못할 해프닝이 속출하고 있다. 노 후보도 본격적인 검증을 거치면서 서민이미지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이제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서로 상대방 후보가 ‘위장서민’이라는 공격을 하는데 화력을 집중하고 있다. 양측은 상대후보가 서민이 아니라는 증거를 모으는데 혈안이 돼 있다. 자연히 정책대결은 실종됐다. 진짜 서민인 대부분의 유권자 입장에서 황당한 일이다.
서민이란 한마디로 ‘돈 없고 빽 없는 사람’이다. 재산이 12억4천5백만원인 이 후보와 8억6천9백만원인 노 후보는 이미 서민이 아니다. 자동차만 해도 에쿠스(이 후보), 체어맨 600S(노 후보)로 가격이 웬만한 서민들의 전세값 수준이다. 더군다나 이 후보와 노 후보는 ‘빽’에 관한 한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이다. 둘 다 판사 출신으로 현직 변호사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서민 출신의 변호사는 있어도 변호사 출신의 서민은 없다”는 말로 위장서민 논쟁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위장서민 논쟁을 벌이는 양측의 뒷얘기는 더욱 가관이다. 얼토당토 않는 논리, 말도 안되는 얘기가 횡행하고 있다. 상대를 잘못 공격하다가 자기 발등을 찍는 경우도 있다.
▲옥탑방=이 후보는 지난 5월24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옥탑방을 묻는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역시 이회창은 서민생활을 모른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더군다나 한나라당이 옥탑방 양성화 법안을 만들고 있는 시점이어서 이 후보는 더욱 곤경에 빠졌다.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 지지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서민들의 주거형태인 옥탑방도 모르나, 위장서민이라는 게 드러났다”고 공격했다.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가 톱 뉴스로 보도하면서 대부분 이 후보의 자질을 비판하는 글이 수백건 떴다.
이 후보측은 비상이 걸렸다. 참모들이 대책회의 끝에 내놓은 해명이 걸작이었다. 이 후보가 옥탑방의 뜻을 알고는 있었지만 토론회 질문자가 고교생들의 은어와 관련된 질문을 한참 한 뒤에 물었기 때문에 다른 뜻을 묻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옥탑방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말도 곁들였다.
그런데 노 후보가 다음날 아침 라디오 방송에 나와 “나도 옥탑방이라는 말을 몰랐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바람에 논평까지 내면서 이 후보를 몰아부쳤던 민주당 대변인실이 머쓱해졌다.
노 후보의 한 측근은 “알았다고 하면 어디가 덧나나, 너무 솔직한 게 탈”이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옥탑방 논쟁은 이것으로 무승부가 됐다.
▲빠순이=이 후보의 단순 실수를 민주당이 서민논쟁으로 비화시켰다. 이 후보는 스승의날인 지난 5월15일 서울의 한 여고에서 특강을 하면서 “여기에 빠순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한 참모가 빠순이는 ‘오빠부대’를 뜻하는 고교생들의 은어라고 이 후보에 말해줬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빠순이란 술집접대부를 가리키는 속어로 밝혀졌다.
민주당은 “딱 걸렸네”라며 공격을 시작했다. 이 후보가 위장서민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빠순이와 서민은 아무 관계가 없으며, 이 후보가 여고생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실수를 했다는 점에서 민주당의 공세는 지나쳤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노 후보측은 “선물받은 셔츠인데, 그렇게 비싼 줄은 몰랐다”고 해명했다. 나중에 노 후보는 “해양수산부 장관을 그만둘 때 여직원들이 돈을 모아 사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민주당 내에서는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측근들이 그런 것도 챙기지 못하느냐”는 힐난이 쏟아졌다. 한나라당은 “40만원짜리를 선물로 받았다면 뇌물에 해당한다”며 공세를 계속했다.
아무튼 티셔츠 논쟁이 있은 후 이 후보와 노 후보의 참모들은 남대문 시장을 돌며 ‘방송 출연용’ 싸구려 옷을 사러 다니고 있다고 한다.
▲보톡스 주사=서민논쟁이 시작할 즈음인 두 달 전쯤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노 후보가 성형외과에서 1백만∼3백만원이나 하는 주름펴기 주사(보톡스 주사)를 맞고 있다”고 말했다. 공식적인 논평을 내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언론이 기사를 써주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보톡스 주사와 대선후보 검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게 언론의 판단이어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서민논쟁이 감정싸움으로까지 격화되면서 한나라당 내에서는 이를 공개하자는 움직임이 나돌았다.
이런 움직임을 알아차렸는지는 몰라도 노 후보는 지난 5월23일 민주당 의원 워크숍에서 “보톡스 주사를 맞아봤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마의 주름이 서민이미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형상인 노 후보가 성형외과에서 비싼 돈을 주고 보톡스 주사를 맞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맞춤 양복=이 후보 부인 한인옥 여사가 기자들을 초청해 집들이를 하면서 “남편은 양복이 두 벌밖에 없다”고 말해 세상사람들을 웃겼다. 계절별로 두 벌이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잘못 알려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대체로 한 여사가 서민을 강조하다 ‘오버’했다는 분석이다.
한 여사의 말은 급기야 이 후보의 관훈토론회까지 이어졌다. 이 후보는 한 질문자가 “양복이 두 벌밖에 없다는데 맞는냐” “지금 입고 있는 양복 상표는 무엇이냐”는 등의 질문을 받고 진땀을 뺐다. 마침 이 후보가 토론회에 입고 나간 양복은 1백만원짜리 맞춤양복이었다.
▲흙묻은 오이, 수돗물=이 후보는 최근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 들러 상인들과 어울리면서 오이를 씻지 않고 먹었다. 이에 민주당은 “서민들도 오이는 씻어서 먹는다. 위장쇼 그만해라”고 비꼬았다.
심지어 자민련 김종필 총재도 “진짜 시골사람은 오이를 바짓가랑이에 쓱 훔쳐서 가시와 흙을 털어내고 베어먹는다. 괜히 안하던 서민노릇 하느라 고생이다”고 비아냥댔다. 이 후보의 한 측근은 “서민들과 친해지려고 한 행동인데, 그런 식으로 몰아부치니 미치겠다”고 말했다.
이 후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수돗물로 주린 배를 채웠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절묘한 ‘반론’이 나오고 있다. 이 후보가 어렸을때 수돗물 보급률이 10%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이 후보 가족은 최소한 10% 내에 드는 상류층이 아니냐는 것이다.
▲서민쇼 하지말고 서민 이해해야=최근 인터넷에는 “이 후보가 장염에 걸렸다”는 글이 떠돌아 다니고 있다. 흙묻은 오이를 그냥 먹다가 병에 걸렸다는 내용이다. 또 “노 후보의 이마 주름살이 원래 임금 왕(王)자 모양이었는데 보톡스 주사로 두 줄을 없애버리는 바람에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말도 나돌고 있다.
둘 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국민들은 ‘위장 서민쇼’보다는 진정으로 서민을 이해하고 서민편에 서는 대통령 후보를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김현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