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얽매인 나날들 “누굴 탓할까 내가 바보였다”
▲ 배구연맹으로부터 영구제명당한 임시형은 인터뷰에서 안타까운 가정사, 유혹에 빠지게 된 사연, 고통과 절망의 나날들, 구단에 대한 아쉬움 등을 모두 털어놨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임시형은 현대캐피탈 입단 첫 해 신인왕을 수상하며 스타플레이어로 발돋움했다. 2009년 국가대표로 월드리그에 출전하면서 대표팀에서도 활발한 활약을 펼쳤다. 그런데 2010년 6월, 문성민에 대한 드래프트 지명권을 소유한 KEPCO45가 문성민과 현대캐피탈의 하경민, 임시형을 맞바꾸는 2대1 트레이드에 합의하면서 임시형은 유니폼을 바꿔 입게 되었다. 현대가 아닌 KEPCO45로 적이 바뀐 임시형은 같은 방 룸메이트였던 염순호를 만나게 됐고, 이 결과가 그의 배구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배경으로 작용했다.
“팀을 옮기고 나서 힘든 일이 많았다. 소심한 내 성격도 작용했을 것이다. 선배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다 2010-2011 시즌이 들어가고 나서 룸메이트였던 (염)순호 형이 그런 제안을 해왔다. 형 말에 의하면 ‘어차피 지는 경기인데, 조금만 도와주면 거액의 용돈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일은 다른 팀에서도 다 하는 일이라 발각돼도 별 일 아닌 것으로 넘어간다’고 설명을 했다. 새로운 팀에서 선배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터라 난 순호 형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고, 형이 하라는 대로 이행했다.”
당시에는 프로축구에서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기 전이라 임시형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조차 못했다고 한다.
“어느 기사에선 박준범이 나랑 룸메이트를 하다 내 꼬임에 빠져 승부조작을 하게 됐다고 썼는데, 난 준범이랑 룸메이트를 한 적도 없었고, 준범이도 연루돼 있다는 사실은 승부조작을 벌이기 전에 순호 형을 통해 들었다. 순호 형이 개별적으로 지시를 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의 실체를 미리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준범이도 나도, 그 일 자체가 큰 범죄인 줄 알았더라면 이런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할 정도다.”
임시형은 모두 세 차례 승부조작에 가담했고 승부조작을 하기 전날 현금으로 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2010-2011 시즌이 마무리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임시형은 사건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엄청난 범죄 행위라는 걸 안 시점은 프로축구 승부조작 사건이 터진 이후였다.
“난 ‘승부조작’이란 말을 그때 처음 들었다. 내가 한 행동이 승부조작이란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지는 게임에서 그 형이 하라는 대로 점수 차를 조절만 해주면 되는 일이라 승부조작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프로축구에서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매일 프로축구 기사만 봤다. 승부조작에 연루된 선수들이 어떻게 되는지 인터넷을 뒤졌다. 하루 하루 불안하고 가슴 졸이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내가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러다 프로배구에서도 승부조작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순간부터 거의 정신줄 놓고 지냈다. 거기다 순호 형이 구속됐다는 소식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한 상태가 됐다.”
3월 28일, 대구지법 결심 공판에서 임시형의 변호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했다. “임시형을 비롯한 나머지 두 선수들은 승부조작 연루설이 알려지기 전에 구단 관계자를 만나 자신의 죄를 밝혔고, 자진 신고를 하겠다고 했지만 구단 측에서 일단 기다려보자고 하는 바람에 자진 신고를 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이와 관련해선 이미 구단으로부터 내용증명을 받아 놨고 관련 서류를 법원에 제출하겠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구단 관계자는 기자의 확인 전화에 “그건 사실과 다르다. 구단에선 그런 적이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 관계자는 또한 “영구제명과 무기한자격정지는 형식만 다를 뿐 결과적으로 같은 의미다. 자진 신고를 한 홍정표가 무기한자격정지를 받았지만, 그 선수가 다시 배구판으로 돌아올 수 있겠나. 아직 선고 공판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이런 일을 다시 들춰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설명했다.
▲ 지난해 8월 11일 KEPCO45 소속의 임시형이 우리캐피탈과의 경기에서 스파이크를 날리고 있다. 연합뉴스 |
“상무 경기를 앞두고 검찰에서 날 찾아왔다. 게임 끝나고 데려가겠다고 얘길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기사가 먼저 터지는 바람에 시합 직전에 체포될 수밖에 없었다. 대구로 가자마자 옷 갈아 입고 수갑 채워지고 하니까 그제야 현실을 제대로 깨닫게 되더라. 무엇보다 수많은 기자들 앞에 그런 모습을 하고 나타나야 한다는 게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구속돼서 2박3일 동안 구치소에 수감돼 있으면서 오랜만에 발을 뻗고 잤다. 가슴을 짓눌렀던 무거운 돌덩어리가 조금 덜해진 것 같았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다음은 나중에 고민하자고 마음먹었다.”
불구속 기소로 풀려나는 바람에 구치소에서 나올 수 있었던 임시형은 복잡한 가정사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일곱 살 때 친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재혼 후 새 가정을 꾸렸는데, 결코 행복하지 못한 삶이었다고 한다. 프로팀에 스카우트되면서 받은 계약금과 연봉을 모두 부모님께 갖다 드렸고, 선수 생활하면서도 ‘청년 가장’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임시형의 선수 생활을 뒷바라지한 사람은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아닌 친누나였다. 돈 때문에 배구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친누나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임시형은 좋은 공격수로 성장했고 프로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그래도 부모님이시니까 처음 받은 거액의 계약금과 연봉을 드리고 싶었다. 물론 연봉 전액을 모두 드릴 순 없었다. 나도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로 선수가 되니까 부모님과 돈 문제로 계속 갈등을 빚었다. 매달 돈 때문에 다툼이 벌어졌다. 선수 생활하는 내내 이 ‘돈’이 날 옭아맸다. 어쩌면 그래서 돈의 유혹에 쉽게 빠졌는지도 모른다.”
4월 18일 선고공판을 앞두고 있는 임시형은 이런 말로 자신의 무지함을 자책했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순호 형으로부터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누나한테나 친한 선수한테 물어봤더라면 내가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 일 자체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 내 자신이 너무 원망스럽기만 하다. 무지에서 비롯된 행동이 내 배구인생을 망가트렸다. 이런 잘못이 배구 팬들에게 얼마나 큰 배신과 상처를 줬는지 너무 늦게 깨달았다. 누구를 탓하겠나. 결국엔 내가 벌인 일이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임시형한테는 배구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 목표가 있었다고 한다. 한 가지가 현대캐피탈 유니폼을 입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가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다 이뤘지만 지금은 그 목표가 더 이상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임시형이지만, 그래도 그는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이번에 공판을 준비하면서 탄원서를 받으러 다녔는데, 정말 많은 선수들이 나를 위해 탄원서를 작성해줬다. 그들은 자기들이 탄원서를 써줬다고 언론에 얘기해도 된다고 했지만, 난 그 말만으로도 너무 큰 고마움을 느낀다. 못난 짓을 한 동료를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구해주려고 애를 쓴 그 선수들한테 꼭 감사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