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 없어도 기업은 잘도 도네
▲ 최창원, 이명희, 이인희, 이건희, 신격호. (왼쪽부터) | ||
이 회장의 경우처럼 재벌가 최고경영자들 중 상당수가 해외에 오랜 기간 체류하는 경우가 많다. 글로벌 경영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서라지만 해외체류 기간에 비해 국내 거주 시간이 턱없이 짧은 모양새를 보면 ‘오너가 없어도 기업은 굴러 간다’는 느낌마저 받는다. 최근 들어 해외 체류가 잦아진 재벌가 경영인들을 보면 저마다 그럴듯한 사정을 내세운다. 이 회장의 지난해 9월 미국행이 ‘도피성’이란 소릴 들었던 것처럼 저마다 나름의 ‘핑계’가 있을 것이란 평이다.
SK그룹의 2세 경영인인 SK케미칼의 최창원 부사장은 최근 몇 년간 잦은 해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최태원 SK 회장의 사촌동생이기도 한 그의 미국 동선이 특히 눈에 띈다. 최 부사장이 지난해 미국에서 보낸 기간은 총 2백53일이다. 1년 중 3분의 2가 넘는 시간을 미국에서 보낸다.
최 부사장은 지난해 3월엔 미국에 가지 않고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6월엔 중국에도 다녀왔다. 이를 모두 합치면 지난해 최 부사장이 해외에 체류한 시간은 총 2백60일이 된다. 국내 머문 시간은 고작 1백5일이다.
이에 대해 SK케미칼측은 “(최 부사장의) 해외 동선은 별도로 파악하지 않는다”면서도 “SK케미칼의 매출 중 수출이 80%를 차지한다. 신규 아이템 개발을 위해 자주 해외에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밝힌다. 최 부사장은 2004년에도 자주 해외에 나갔다. 그러나 2004년의 해외 체류 기간은 90일이며 그 중 미국에 머물렀던 기간은 70일이다. 2005년의 해외동선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최근 들어 재계 일각에선 최 부사장이 미국 유학중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의 최근 미국 동선을 보면 그럴 듯해 보인다. 특히 지난해 미국일정을 보면 20~30일 정도 미국에 체류한 뒤 국내에 10일 정도 머무는 식의 동선이 자주 반복되었다. 3월과 6월을 빼곤 거의 매달 미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에 대해 SK케미칼측은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 당시 친인척 경영자의 퇴진 움직임이 이어지면서 (최 부사장도) 미국 유학을 고려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며 “미국 유학 소문은 아마도 SK글로벌 사태 당시 퍼진 유학설 때문일 것”이라 밝혔다. 최 부사장은 올 1월 초에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최 부사장이 해외와 한국을 자주 오가는 편인 반면 이명희 신세계 회장은 한번 비행기 타고 나가면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스타일이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딸이자 이건희 삼성 회장의 여동생인 이명희 회장이 지난해 해외에 체류한 기간은 2백 일이다. 지난 2004년엔 해외에서만 무려 2백40일을 보냈다.
2003년 말에 미국에 갔다가 2004년 2월 말에 돌아온 이 회장은 일주일 후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5월 중순에 귀국했다. 7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3개월 동안 미국과 프랑스를 다니기도 했다. 2004년 말 미국에 간 이 회장은 이듬해인 2005년 4월 중순에서야 귀국했다. 무려 1백12일을 해외에서 보낸 셈이다. 이후 2005년 7월 초부터 9월 말까지 일본과 미국을 다녔다. 당시는 안기부 도청 문건 사건으로 삼성그룹 안팎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무렵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 12월 말 미국으로 출국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회장의 해외 동선에 대해 신세계측은 “아는 바가 없다”고만 밝힌다. 지난해 본점 확장오픈 등 국내 사업분야에 치중해야할 시점이었다는 시각에 대해선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대주주인 이 회장이 직접 현장경영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신세계 관계자는 “(이 회장이) 자주 해외에 나가 현지 유행 흐름을 관찰하고 돌아와 경영진에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며 이 회장의 해외출장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신격호 롯데 회장도 일년의 절반을 해외에서 보내는 것은 다른 기업 총수 등과는 달리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의 주 행선지는 물론 일본이다. 한달은 한국에 머물며 한국롯데를 총괄하고 다음달엔 일본에 건너가 일본롯데 사무실을 지킨다. 한국 일본을 오가며 격월제 경영을 하는 셈이다. 물론 대선 비자금 사건 등 ‘곤란한 사건’이 생기면 몇달씩 국내에 들어오지 않기도 한다.
롯데그룹 인사들은 신 회장이 국내에 머무는 달엔 단단히 긴장을 해야 한다. 매일 오전 한 차례와 오후 한 차례로 나눠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들과 일대일 면담을 갖기 때문이다. 롯데 안팎에선 ‘한 달간 신 회장의 호출 명령을 기다리다가 면담을 마친 뒤 신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가면 그제서야 마음을 놓는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들어 신 회장 아들인 신동빈 부회장이 경영 전반을 챙기기 시작해 롯데 대표이사들의 ‘격월제 평화’도 깨져가는 듯하다. 신 회장이 한국을 비운 사이엔 신 회장과 마찬가지의 스타일로 신 부회장이 ‘면담식 경영’을 펼친다는 것이다.
장기외유를 마치고 지난 4일 귀국한 이건희 삼성 회장 역시 보통 1년에 3분의 1 정도는 해외 일정을 소화해왔다. 이미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선 삼성그룹의 특수성 때문에 해외 업무가 많다는 게 삼성측의 한결같은 답변이었다. 도피 의혹을 샀던 지난 5개월 동안 이학수 부회장이 미국과 일본을 수시로 오가며 이 회장의 결재를 받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 아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도 지난해 1백 일 정도를 해외에서 보냈다. 특히 지난해 12월 중순엔 이학수 부회장과 미국에 동시출국했다가 같은 날짜에 귀국해(12월16일~12월19일) ‘이건희 회장과 향후 대책에 대한 3자 논의를 가졌을 가능성’이 대두되기도 했다(<일요신문> 714호, 1월22일자 보도).
이건희 회장의 누나인 이인희 한솔 고문도 해외에 자주 나가는 편이다. 주로 겨울철에 따뜻한 나라에 가서 계절을 다 보내고 돌아오는 편이다. 이에 대해 이 고문 아들인 조동혁 한솔 명예회장은 이인희 고문 평전 <한솔, 그 푸른 꿈을 향해 걸어온 길>에서 ‘한국전쟁 당시 엄동설한에 피난으로 고생하다 무릎을 심하게 상해 추위에 유난히 약하신 편…. 요즘 겨울철이면 따뜻한 곳으로 가서 지내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의 경우처럼 과거에도 복잡한 국내사정을 뒤로 하고 외유를 떠나 ‘도피’의혹을 샀던 그룹 총수도 많다. 지난 2002년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고객 원금까지 까먹는 시련을 겪은 뒤 유학을 이유로 미국으로 떠나 9개월간 체류했다. 당시 ‘정치자금 연루설’ 등 이런저런 괴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같은 해 KTB네크워크 권성문 사장은 사장직을 내놓고 미국법인 경영을 맡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그의 퇴진에 대해 증시에선 경영악화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특히 일각에서는 당시 주가조작 사건 등과 관련한 검찰수사가 진행되면서 사정칼날을 피하기 위한 ‘도피성 외유’라는 의혹도 제기됐던 바 있다.
오너의 장기 해외체류 때마다 이런저런 ‘설’이 나돌고 있는 것은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등기이사가 경영현장을 떠나 장기간 해외에 머문다는 게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