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등등 ‘황사’에 KO 두방 먹였다
8강전은 이세돌-박문요, 원성진-장웨이지에, 김지석-콩지에, 박정환-천야오예의 대결인데, 날짜와 장소는 미정이다. 한국 진용에서는 이창호 강동윤 최철한 박영훈 등이 보이지 않고, 중국 진용에서는 구리 씨에허 탄샤오 등이 빠져 있다. 특히 이창호의 결장이 새삼 두드러진다. 선수가 아닌 내빈으로 참석했던 중국의 창하오 9단이 “이창호 9단이 여기 없는 것은 한 시대가 끝났음을 상징하는 듯하다”면서 소회를 피력했다.
춘란배 대국 중에서 이세돌 9단과 박정환 9단의 바둑을 소개한다. 중국 상대의 도발을 그냥 돌려차기 일격으로 끝내버리는 모습이 멋졌다. 올 초부터 한·중전에서 거푸 밀린 것을 생각하면 후련한 느낌도 있다. 춘란배는 제한시간 각 3시간에 1분 초읽기 3회. 장고바둑이다.
<장면 A>는 박정환 9단과 미위팅 3단의 바둑. 박 9단은 2회전 시드를 받았고, 미위팅는 일본의 노장 요다 노리모토 9단(46)을 꺾고 올라왔다. 요다 9단은 유창혁 9단과 66년생 동갑. 이창호와 창하오가 이제 장강의 앞 물결이라면 유창혁과 요다는 또 그 앞의 물결이다. 조금 지나면 합류하게 되겠지만. 박 9단은 19세, 미위팅 3단은 16세, 세 살이나 더 어리다. 탄샤오 양딩신 멍타이링 등 최근 등장한 중국 10대 준재군의 일원이다. 양딩신은 14세다. 박 9단으로서는 모처럼 후배를 만난 것.
박정환이 흑이다. 미위팅이 백1로 좌변 흑진에 들어왔다. 흑2는 상용의 수법, 최강의 응수. 여기서 다시 백3의 저공 침투. 일견 그럴 듯한 테크닉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때 이른 패착이 되고 말았다. 박정환이나 미위팅이나 이른바 천재 계보인데, 흑의 다음 한 수가 ‘형님’다운 수였던 것.
백3에 대해서 <1도> 흑1로 받으면, 그때 백2로 올라간다. 흑3에는 백4 젖히고 흑5로 끊으면? 이게 안 된다. 백6에서 단수치고 <2도> 1-3으로 짓쳐가는 수가 있다. 흑이 간단히 걸린 그림이다. 또 <3도> 흑1쪽을 이으면, 그때는 백2, 4를 거쳐 6, 8로 간단히 자리를 잡는다. 물론 백이 성공한 그림. 흑은 남은 게 없어 보인다. 이렇듯 <2도><3도>가 백의 복안이었고, 달콤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4도> 흑1, 아래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중앙을 점잖게 꾹 눌러간 것이 결정타였다. 백2, 4, 6으로 당황한 모습이다. 흑7로 끊겨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다음 백A로 나가는 것은 흑B 백C 흑D 백E에서 흑F로 막아 ‘빈 축’이다.
지나친 기교가 화를 부른 꼴. 백은 좌변의 출혈이 너무 커 얼마 버티지를 못하고 151수 만에 돌을 거두었다.
<장면 B>의 주인공은 이세돌 9단과 치우쥔 9단. 이 9단이 흑이다. 치우쥔 9단은 별명이 마왕이다. 어떻게나 끈질긴지. 바둑 둘 때 머리를 바둑판에 파묻듯 수그리고 또 수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형세가 웬만큼 불리해도 그런 자세로 끝까지 물고 늘어지니 보는 사람이 먼저 질린다.
초대형 대마 추격전이다. 백은 초반에 실리를 챙길 대로 챙긴 후 상변 흑의 큰 모양에 단기돌입했는데, 그게 흑의 맹공을 받으며 점점 커지더니 이제 30알짜리 대마가 되었다. 바둑 동네에서는 이 정도 되면 대마가 아니라 ‘태마(太馬)’라고 부른다.
공격의 이세돌이다. 대마가 무지하게 시달리고 있는 모습. 그러나 대마불사, 설마 잡히기야 하겠는가, 치우쥔은 그런 생각이었을까. 검토실은 반신반의. 대마가 잡힐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세돌이니까.
백1로 눈 모양 비슷한 것을 만들고 3으로 흑의 공배도 메우는 겸해서 반집을 만들자 중국 검토실에서는 “산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왔다. “흑4로 파호하는 것은 백5의 급소 일격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백5 다음엔 <1도> 흑1로 이어야 하는데, 백2로 젖히는 수가 성립해 우변 흑 일단이 거꾸로 잡힌다는 것. 흑3에는 백4로 A, B가 맞보기니까. 또 흑3으로 4의 곳을 찌르는 것도 백C 흑A 때 백이 3의 곳을 이어 대동소이. 그러니 이세돌은 <2도> 흑1로 지켜야 할 텐데, 그러면 백은 2, 4를 선수해 한 집을 만들고 6으로 완생한다는 것. 그러나 이세돌은 <장면 B>의 흑4로 찝으면서 웃고 있었다.
<3도> 흑1, 백에는 흑A로 잇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여기를 먼저 끼우는 수, 이게 필살의 한 수였다. 흑1 다음 가령 <4도> 백1로 단수치면 흑은 그때 2로 잇고 백3에는 흑4로 끊어 해결하는 것. 치우쥔 9단도, 중국 검토실도 간과하고 있었던 수였다. 치우쥔은 마왕답게 돌을 거두지 않고 장고를 거듭했으며 바둑은 이후에도 30여 수가 더 진행되어 백 대마는 무려 40알짜리가 되어 함몰했다. <3도> 흑1이 실전 흑167수, 백이 돌을 거둔 것은 흑191수.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