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운전 판단미스 대선가도는 어쩌나
▲ 문재인 당선자의 선거유세 모습. 부산, 울산, 경남에서 새누리당의 압승으로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대망론이 타격을 받게 됐다. 사진제공=문재인 당선자 |
지난 11일 4ㆍ11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가 새누리당의 완승으로 굳어져갈 무렵 한 선거 전문가가 내놓은 평가다. 이 인사는 “이번 총선이 12월 대통령선거의 전초전 성격을 띤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대 수혜자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고, 최대 피해자는 문재인 민주통합당(민주당) 상임고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문 상임고문의 총선 성적표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박근혜 바람’을 뚫고 영남권 교두보를 마련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야권 지지층에게 “그래도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말은 큰 위로가 되지 못할 것 같다. 이번 총선 최대 관심지역이었던 PK(부산ㆍ울산ㆍ경남)에서 민주당-통합진보당 선거연대 후보 중 당선자는 문 상임고문(부산 사상)과 조경태(부산 사하을)ㆍ민홍철(경남 김해갑) 후보 등 3명이다. 이들 모두 민주당 후보이고 통합진보당 후보들은 전멸했다. 울산(조승수), 창원(권영길), 사천(강기갑)에 있었던 교두보마저 모두 무너졌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용은 더 빈약하다. 조경태 당선자는 민주당이 초토화됐던 2008년 18대 총선에서도 재선 고지에 올랐던 인물. 이번 총선에서 그의 승리를 ‘문재인의 승리’로 보기 어렵다. 민홍철 당선자는 상대(김정권 의원)가 그리 강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누리당 김태호 의원과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인 김경수 후보가 맞붙었던 김해을에서 승리하는 게 문 상임고문에겐 더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유일한 위안거리는 PK 지역 비례대표 정당득표율이 높게 나왔다는 점이다. 부산에서 민주당은 31.78%, 통합진보당은 8.42%의 정당득표율을 기록했다. 두 당을 합치면 40.20%에 달한다. 울산에서도 41.52%(민주당 25.22%, 통합진보당 16.30%), 경남에서도 36.14%(민주당 25.61%, 통합진보당 10.53%) 등 높은 정당득표율을 기록했다.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부산 29.9%, 울산 35.3%, 경남 27.1%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에 비춰보면 고무적인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상임고문이 ‘박(박근혜) 잡을 매’로서의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른바 낙동강 벨트에 문 상임고문과 문성근 최고위원, 김영춘ㆍ김정길 전 의원, 김경수 전 비서관 등을 집중 투입하면서 민주당은 내심 ‘부산 5석’, 통합진보당과 합해 ‘PK 10석’ 정도의 성적표를 기대했었다. 때마침 문 상임고문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제치고 박근혜 위원장에 맞설 야당 대표주자로 부상했던 터였다. 민주당으로선 ‘대선주자 문재인’이 새누리당 텃밭인 영남에서 ‘박근혜 대세론’을 밑둥부터 흔들어주길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문풍’은 아직 너무 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근혜 대세론’을 잠재우고 명실상부한 야권 대선주자로 발돋움하려던 문 상임고문의 구상에도 차질이 생겼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초라한 성적표 외에도 이번 총선 과정에서 문 상임고문의 대권 경쟁력을 의심할 만한 징후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초보 정치인’의 한계를 수차례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한 정치평론가는 “지역구 선택에서부터 전략 부재를 드러냈다”면서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대선주자가 굳이 왜 총선에 출마하는지, 그것도 왜 부산에 출마하는지 선거 전략을 통해 보여줬어야 했다. 지역주의의 장벽을 뚫고 ‘이명박 정권 심판론’을 영남으로까지 확대하는 게 목표 아니었겠나. 그랬다면 부산의 변방인 사상이 아니라 중심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또 선거운동 과정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숙원이었던 ‘지역주의 철폐’를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PK 곳곳을 훑고 다니며 전체 판도를 뒤흔드는 전략을 썼어야 했다.”
메시지와 선거운동 방식 모두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다. 또 다른 선거 전문가도 “총선을 거치면서 문 상임고문의 상대가 마치 손수조(새누리당) 후보처럼 구도가 잡혀간 게 문제”라며 “아예 상대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문 상임고문 측이 경륜과 힘 있는 일꾼론으로 맞서면서 새누리당이 친 프레임에 갇힌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적 판단력에도 문제점이 노정됐다. 민주당 공천 잡음이 절정에 달했을 무렵 문 상임고문이 보인 행보는 두고두고 당내에서 논란이 됐다. 당시 그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 등과 ‘혁신과 통합(혁통)’ 상임고문단 회의를 거쳐 한명숙 대표를 만나 임종석 당시 사무총장과 이화영 후보에 대한 공천 철회를 요구했다. 공식 지도부가 아닌 사람이 당대표를 압박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한 것도 문제였지만, 당시 두 사람의 회동 때 문 상임고문이 혁통 측 인사들의 공천을 요구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면서 당내에선 “문재인ㆍ이해찬이 상왕(上王)이냐”는 비난의 목소리가 나왔었다.
선거전 막판 김용민(서울 노원갑) 후보의 막말 파문이 최대 악재로 부상, 한 대표가 김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려 할 때에도 문 상임고문은 이를 만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총선 이틀 전인 9일에는 ‘나는 꼼수다’ 멤버들과 함께 부산 지역 민주당 후보 지원유세를 하고 ‘나꼼수’ 방송에도 출연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한 당내 인사는 이를 두고 “문 상임고문의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든 사건”이라고 평했다. 총선 결과가 나온 뒤 한명숙 대표가 사퇴 의사를 밝혔을 때에도 문 상임고문은 이해찬 전 총리 등과 함께 이를 만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어쨌든 총선은 끝났고 이제 대권을 향한 주자들의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될 태세다. 총선 전까지만 해도 문 상임고문은 야권 내에서 가장 많은 ‘적립금’을 쌓아 둔 대선주자였지만 이제는 그 상당 부분이 축난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호남 정치세력으로부터 공천을 망친 친노(친노무현)그룹의 핵심 인물로 비토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 상임고문 앞에 험난한 대선가도가 놓여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시련을 딛고 크는 법. 다사다난했던 총선 과정에서 얼마나 정치적 근육이 단련되고 맷집이 좋아졌는지 이제부터는 문 상임고문이 스스로 증명해보일 차례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