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 계신 오마니, 너무 그립습네다
▲ 홀로 한국으로 탈북한 조명철 당선인이 1991년 3월 평양시 자택에서 모친(강하옥)과 찍은 사진. 모친 강 씨는 인민경제대학 통계학과 교수였다. 어머니의 생존 여부에 관해 조 당선인은 “소식을 전하는 이마다 말이 다르다. 몇 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다”라고 밝혔다. |
조 당선인은 북한 김일성 국가주석이 사망한 1994년 7월, 제3국을 거쳐 남한으로 귀순했다. 그 후 18년이 지나 탈북자 최초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귀순 이후 통일부 소속으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에서 일해오던 그는 정치권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 포격 사건을 꼽았다. 조 당선인은 이에 대해 “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의 40배가 넘는다. 경제력만이 아니라 지적 문화적 사회적 성숙도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북한 정권에 의해 쉽게 유린당하는 우리 모습에 가슴이 아프고 그때마다 여야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안타까웠다”라고 밝혔다.
아무런 학연·혈연·지연이 없는 조 당선인은 새누리당 측의 파격적인 조건(비례대표 4번)으로 선거 전 당선을 확정지었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받은 ‘준박사’ 학위와 이후 교수 생활에 대해 의심의 시선이 완전히 거둬지지 않았기 때문. 조 당선인은 “300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이 정도의 의혹과 마타도어를 거치지 않은 의원이 어디 있겠느냐”며 애써 담담히 말했지만 인터뷰 도중 “아직 우리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탈북자 최초로 1급 공무원직(통일교육원장)에까지 오른 조 당선인은 가장 성공한 탈북자로 꼽힌다. 그만큼 남들보다 열심히 일에 몰두한 까닭에는 세상이 알지 못한 사연이 숨어있었다. 그는 “십수년 전 동료들과 함께 등산을 간 적이 있는데 산을 오르면 혼자 생각에 잠기게 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등산 내내 북한 시절의 아픔이 생각나 힘들었고 이후 10년 동안 등산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일에만 집중했다”고 밝혔다. 조 당선인은 귀순 후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교회 셋방을 벗어나 반 지하로 이사해 마음껏 떠들고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었던 시절”을 꼽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남한으로 건너 온 탈북자는 영원한 사회적 약자이며 이방인이다. 그렇기에 더욱 정치권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매일 16㎞를 걸어서 출근하는 탈북자 청년이 있다면 믿겠는가. 그나마 취직하는 것은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그들에게 일자리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다짐을 밝혔다. 하지만 북에서도 남에서도 줄곧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 온 그가 우리 사회 가장 취약계층인 2만 4000여 명의 탈북자들을 대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문을 표하는 이도 없지 않다. 조 당선자의 의정활동을 기대해본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