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지도자로 다시 한솥밥 먹자
▲ 최태웅(왼쪽)이 동갑내기 라이벌 석진욱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축하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우승’이란?
석진욱(석): 우승은 우승하는 순간에만 좋은 것 같다. 우승 후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허전해지는 기분이다. 특히 이전에는 이 기쁨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동기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또래 선수가 나 혼자이다 보니 더 이런 마음이 생긴다.
최태웅(최): 이번 시즌은 진욱이가 수술 후 1년 만에 복귀하는 무대라 더욱 간절히 우승을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난 시즌보다 삼성화재의 전력이 더욱 단단해졌다. 역시 석진욱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선수 입장에선 아쉬웠다. 우리가 챔피언결정전에 올라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더 멋진 승부가 펼쳐졌을 것이다.
▲ 2009년 삼성화재에서 콤비로 활약했던 최태웅과 석진욱. 연합뉴스 |
석: 태웅이를 이렇게 밖에서 만나면 괜찮은데, 아직도 코트에서 마주보고 서 있으면 어색하고 이상한 느낌이 든다. 지금도 태웅이가 토스하는 걸 볼 때마다 ‘와, 저렇게 올려주면 나도 잘 때릴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석진욱’이란 이름을 알린 배경에는 태웅이의 자로 잰 듯한 정확한 토스가 절대적이었다. 지금 (유)광우가 열심히 하고 있고, 올 시즌 맹활약을 펼쳤지만 나한테는 공을 잘 안 준다(웃음). 그런 점에서 내 인생 최고의 세터는 최태웅이다.
최: 만약 지금까지 내가 삼성화재에 있었다면 나라도 진욱이한테는 토스하지 않았을 것이다(모두 폭소). 그러니까 광우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라.
석: 솔직히 세터가 공 달라고 한다고 흔들리면 안 되지. 그걸 잘 알고 있고 내가 공격에 욕심내면 우리 팀이 무너진다는 사실 또한 인지하고 있다. 그래도 시합이 진행되다 보면 어느새 득점에 욕심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그럴 때마다 광우한테 “야, 공 좀 줘봐. 이 상황에서 나한테 공 주면 아무도 막지 못해”라고 말하는데, 그러다 신치용 감독님한테 들켜서 몇 차례 혼난 적도 있었다. 자꾸 공 달라며 보챈다고. 하지만 5세트 동안 득점이 하나도 없을 때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아나. 내가 팀에 1득점도 못 보태는 선수구나 싶다. 그런데도 팀은 이긴다(웃음).
#삼성의 단점을 꼽는다면?
최: 글쎄, 우승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는 몰라도 삼성 선수들의 표정이 어둡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에 와 보니 선수들이 배구를 즐기려는 자세가 돼 있더라. 이런 부분은 삼성에서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우리가 뛰고 구르는 이 코트가 신나고 즐겁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선수가 재미있어 해야 보는 관중들도 좋아해주지 않겠나. 그래서 경기 중간 중간에 세리머니도 하고 관중들과 함께 호흡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석: 확실히 태웅이가 변했다. 삼성에선 그런 쇼맨십을 기대할 수 없었는데 현대로 간 뒤에 태웅이가 많이 달라졌다. 그런데 난 세리머니, 쇼맨십 생각하면서 배구를 할 수 없다. 집중이 안 되기 때문이다. 태웅이가 우리 팀 선수들 표정이 어둡다고 하는데, 자기도 우리 팀에 있을 땐 똑같은 표정이었다(웃음). 그래도 그 안에선 즐거운 일도 있고 행복한 일도 있다.
▲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석: 초등학교 3학년 때 태웅이랑 같은 반이었지만 배구부에 들어가기 전까진 친하지 않았다. 난 형이 먼저 배구를 하고 있어서 형 따라 공 주으러 다니다가 감독님 눈에 들어 배구를 시작했기 때문에 배구부에서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는 게 반갑긴 했었다.
최: 난 육상과 배구 중에서 어떤 부를 선택해야 할지 갈등이 있었다. 그런데 먼지 나는 운동장에서 뛰는 것보다 체육관에서 뛰는 게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선수로 등록이 됐던 것 같다.
석: 태웅이랑은 대학 때 본격적으로 친해진 것 같다. 내가 부상으로 시합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주말 외박이 주어지면 태웅이가 나한테 용돈을 주면서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사먹고 들어오라고 얘길 했다. 그때 정말 고마웠다.
최: 그런데 진욱이가 삼성화재 입단 후에 배신을 때렸다(웃음). 형들이랑 몰려 다니면서 날 외면했다. 그때가 내 배구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을 것이다. 내가 좀 까부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신 감독님께서 그걸 죽이려고 하셨고, 3년을 부대끼다가 5년이 지난 후에야 조금 편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그때는 진욱이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해서 선배들이랑 자주 어울렸고, 난 반대로 내성적이 돼 형들과 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혼자 생각을 많이 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진욱이가 운동을 그만둔다면서 숙소를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좀 더 강하게 붙잡았어야 했는데 조금 냉정하고 무심하게 진욱이를 대했다. 많이 서운했을 것이다.
석: 그래도 태웅이가 내가 팀을 나간 이후에 몇 차례 전화도 하고 그랬다. 전화올 때마다 일부러 잘 지낸 척하고, 운동 안 하니까 세상이 다 내 것 같다면서 좋아하는 척하고 그랬다. 하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부상도 있었고,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운동 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어 감독님께 말씀드리고 팀을 나온 것인데, 막상 나와 보니까 다시 숙소 생활이 그리워지더라. 5개월이 지난 후 어머니의 병세가 호전됐을 때 어머니께서 다시 배구를 하라고 등을 떠미는 바람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때도 태웅이의 반응은 썰렁했다. 내가 왔다고 얘기하니까, “그래? 알았어”하고 말하더라.
최: 아마 그때가 가장 안 좋았던 시기였을 것이다. 우리 둘 사이가. 돌이켜보면 남자들 우정에서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미워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고.
#그리고 암…
석: 나도 태웅이가 림프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기사를 보고 알았다. 그때 정말 많이 놀랐다. 나한테 털어놓지 못한 친구에 대한 서운함보다는 이걸 감추고 운동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마음이 너무 아팠다. 당시 현대로 팀을 옮긴 것도 큰 충격이었고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을 텐데 암이 발견됐고 수술까지 한 뒤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경기를 뛰었으니…. 태웅이가 독한 놈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때 일을 보고 정말 독한 놈이란 걸 다시 절감했다.
최: 오히려 그 일로 인해 생각의 폭이 넓어졌다. 수용하고 인정하는 면이 탄력적으로 형성됐다. 이전에는 우승에 집착하고 우승을 위해 사는 선수였다면 암을 이겨낸 후로는 내가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것 자체에 더 큰 감사를 느꼈다.
석: 그런데 경기를 하다 보면 태웅이를 흔들어야 현대캐피탈을 쉽게 공략할 수 있는 길이 보일 때가 있다. 태웅이가 나가고 (권)영민이가 들어오면 아무래도 편하게 경기를 할 수 있으니까 서브를 넣을 때도 일부러 세게 보낸다. 그래야 태웅이가 힘들어지니까.
최: 삼성뿐만 아니라 다른 팀 모두가 날 빨리 내보내려 안달이다(웃음). 감독님들이 작전타임 걸어서 하시는 말씀이, “야, 태웅이를 자꾸 점프하게 만들어. 그래야 체력이 떨어져 나갈 거 아냐”라고 주문한다. 오기가 나냐고? 아니다. 몸에서 신호가 오는 걸 어쩌겠나. 이전에는 열 받아서 더 악착같이 뛰어다녔지만 지금은 과감히 교체 신호 보내고 나간다.
석: 태웅이뿐만 아니라 나도 점프가 안 될 때는 힘들다. 우리 나이에 오기를 부리면 안 된다. 가끔은 공이 오더라도 그냥 보고 먹을 때도 있다.
#은퇴는 아직
석: 난 은퇴 얘기를 밥 먹듯이 했다. 신 감독님이 싫어하실 정도로. 몸이 안 되니까 당연히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광저우아시안게임 이후 십자인대 수술과 어깨 수술을 받은 덕분에 오히려 지금은 몸이 더 좋아졌다. 챔프전 끝나고 나선 몇 게임 더 뛰고 싶을 정도로 몸 상태가 너무 좋은 거다.
최: 그건 네가 공을 안 때리고 수비만 하니까 그렇지(웃음). 은퇴 시기는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닌 것 같다. 구단이 정해주는 거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조금 더 선수로 뛰고 싶다.
석: 난 태웅이랑 선수로든 아니면 다른 형태로든 배구코트에서 계속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 태웅이가 존재했기에 석진욱이 있는 거다. 정말 좋은 친구이자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태웅이를 뛰어 넘으려고 발버둥쳤다. 죽을 때까지 태웅이랑 같은 일에 종사했으면 좋겠다.
최: 진욱이는 내 가족이고 친구다. 미워할 때도 있었지만 만나면 가슴이 찡해지는 그런 사이다. 나 또한 진욱이랑 한길을 걷고 싶다. 배구를 한다면 지도자로 만나야 하는데, 같은 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얘기를 듣고 있던 석진욱이 조용히, 그리고 의미있는 반응을 내보인다. “태웅아! 신 감독님이 그러시는데, 날 코치로 쓰려 해도 어깨가 안 좋아서 쓸 수가 없대. 그러니까 내가 감독하고, 어깨 좋은 네가 코치하는 건 어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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