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경질 논란 속 1위 탈환…세계적 명장 아본단자 부임으로 선수들 사기 높아져
어수선했던 한 달여가 지나고, 흥국생명은 비로소 팀 재정비를 마쳐가는 모양새다. 어느덧 정규리그 우승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세계적인 명장을 새 사령탑으로 맞았다. 부담감에 짓눌렸던 김연경도 이제야 어깨를 펴고 활짝 웃는다. 흥국생명은 팀의 기둥인 김연경과 함께 정규리그·챔피언결정전 통합 우승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2위 감독'이 경질됐다?
사태의 발단은 새해가 시작하자마자 전해진 감독의 퇴진 소식이었다. 흥국생명은 지난 1월 2일 돌연 권순찬 감독과 김여일 단장이 동반 퇴진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임형준 구단주는 보도자료를 통해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감독의 결정이 부합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권 감독과 헤어지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납득하기 어려운 설명이었다. 흥국생명은 정규시즌 절반이 지난 3라운드까지 2위를 지켰다. 무엇보다 3라운드 마지막 경기였던 지난해 12월 29일 1위 현대건설과 맞대결에서 승리하면서 승점 3점 차까지 따라붙은 참이었다. 팀 간판스타인 김연경은 "내 목표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 같다. 당연히 우승을 바라보며 뛰고 있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권 감독은 한창 상승세를 탄 선수들에게 격려의 의미로 새해 1일까지 휴가를 줬다.
그런데 선수들이 휴가를 마치고 복귀하던 2일, 권순찬 감독이 물러난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난해 5월 흥국생명 사령탑으로 부임한 지 8개월 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권 감독의 선수 기용에 간섭하던 구단 측이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했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 소문은 여러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기정사실화했다. 일부 선수가 구단의 방침에 크게 반발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팀의 간판 김연경이 3일 훈련에 불참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이영수 수석코치는 "(감독 경질이 발표된) 2일은 분위기가 좋지 않아 정상적인 훈련이 어려웠다. 선수들과 대화를 하면서 분위기를 추슬러야 했고, 되레 선수들이 나를 걱정해주기도 하더라"면서도 "김연경 선수는 컨디션 문제로 3일 훈련에 빠졌지만 다른 선수들은 평소처럼 운동했다. 또 4일엔 김연경 선수도 별 탈 없이 훈련에 함께했다"고 확대 해석을 진화했다.
사실 가장 난감했던 사람은 권순찬 감독과 함께 흥국생명에 왔던 이영수 코치 본인이었다. 자신이 보좌하던 감독이 갑자기 팀에서 쫓겨났는데, 사흘 뒤인 1월 5일 GS칼텍스전에서 감독대행으로 지휘봉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여론과 팬들의 분노도 들끓었다. 일부 팬은 응원용 클래퍼를 자체 제작해 이날 경기장에 입장하는 관중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흥국생명 구단이 제작한 클래퍼를 들고 응원할 수는 없다"는 뜻에서였다. 이 코치는 5일 경기 전 "내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이 많지 않다. 감독님은 그저 '힘 내라'는 말씀을 하시고 떠나셨다. 코치 입장에선 당장 열리는 경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며 "나 역시 이런 상황은 처음 보고, 자세한 내막은 모르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일단 선수들을 다독여서 눈앞의 경기를 잘 끝내겠다. 프로로서 팬들에게 좋은 경기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했다.
#논란 키운 신임 단장의 해명
이보다 더한 촌극은 그 후에 벌어졌다. 논란의 핵심 주체였던 김여일 전 단장의 뒤를 이어 새로 부임한 신용준 단장이 5일 경기 전 취재진과 만남을 자청했다. 신 단장은 머리 숙여 인사하며 "시즌 중 단장과 감독이 물러나는 일이 벌어져 우리 구단을 아껴주신 팬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 추후 선수들이 좋은 경기를 보여드릴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어진 취재진의 질문에 엇나간 해명을 내놓아 구단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를 더 키웠다.
신 단장은 구단의 선수 기용 개입 의혹과 관련한 질문을 받자 "전 단장님이 선수 기용에 개입한 건 아니다. 경기 운영 문제를 놓고 감독과 갈등이 있었다"며 "팬들이 원하는 로테이션을 경기에 반영하려다 (구단과 감독의) 의견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고 답변했다. 신 단장은 또 "유튜브 등에서 팬들이 요구하는 부분을 충실히 반영하려 했다. 우리 팀은 우승을 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으니 그런 부분을 고려해 (단장이 감독에게) 조언한 게 아닌가 싶다"며 "구단은 팬들의 사랑도 받아야 하고, 우승도 해야 한다. 김연경 선수가 있을 때 우승을 해야 하지 않나. 가능하면 우승하는 팀으로 만들기 위해 계속 서포트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구단이 감독의 전권인 로테이션 운영에는 개입해도 된다는 의미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에는 "아직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한발 물러났다. '배구 전문가인 감독의 생각보다 비전문가인 팬들의 요구를 따르는 게 우승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그럴 수도 있다"고 답해 빈축을 샀다. 전임 단장의 월권 의혹을 지우려 애쓰다 도리어 더 거센 후폭풍을 일으킨 것이다.
신 단장은 2015-2016시즌 흥국생명 배구단 단장을 맡은 경력이 있다. 스스로 그 점을 강조하면서 "구단과 유대관계를 계속 맺어왔다. 김연경 선수를 비롯한 베테랑 선수들과도 알고 지냈다. 그 선수들은 나를 이해해주는 편이라고 생각한다"며 "부임한 뒤 '팬들이 있으니 다시 힘을 합해서 열심히 해보자'고 설득했다. 선수단 반응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자신했다. 그러면서도 불리한 질문이 나오면 변함없이 "갑자기 발령을 받아 잘 모른다"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저 "앞으로 코칭스태프와의 소통을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반영하면서 (구단을) 운영하겠다"고 원론적인 해결책만 제시했다.
#감독대행 맡은 수석코치도 사퇴
흥국생명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영수 코치가 결국 한 경기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이 코치는 이날 GS칼텍스전을 세트스코어 3-2 승리로 마친 뒤 "실은 감독님이 떠나실 때부터 함께 그만두려고 했다. 이 경기를 끝으로 나도 그만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사퇴 이유로는 "우리는 지난 5월부터 함께 훈련을 해오면서 가장 좋다고 판단한 포지션대로 경기를 해왔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어차피 내가 있더라도 상황이 달라지는 게 없으니 나도 물러나는 게 맞다"며 "나는 권 감독님께 배운 게 많은 사람이라 불편하게 팀에 머무는 것보다 내 마음이 편한 길을 선택하겠다"고 털어놨다.
이 코치의 사퇴는 선수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겼다. 베테랑 김연경과 김해란도 경기 직전 이 코치가 구단에 사의를 밝힌 사실을 모르고 코트에 나섰다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전해 듣고 서로 마주 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김연경은 이내 "어디까지 감당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마음이 복잡하다"며 "선두와 큰 차이가 안 나서 이제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생겨서 너무 아쉽다"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또 "감독님 문제로 선수 전체가 많이 당황했고 힘든 마음이었지만, 팬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경기를 했다. 그런데 이영수 코치님까지 물러나신다니 뭐라 할 말이 없다"고 착잡해했다.
김연경은 내친 김에 구단을 향한 '돌직구'도 던졌다. "선수들 역시 (구단이 선수 기용에 개입하려 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문제 때문에 몇 번 경기에 진 적도 있다"고 했다. 김해란도 "구단의 개입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한 선수들도 있다. 내가 권 감독님께 선수들 입장을 말씀드리기도 했다"며 "감독님 입장에선 (구단에서)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셨을 것 같다. 안타까울 따름"이라고 털어놨다. '선수 기용 부분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구단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다. 김연경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얘기하는 것 자체가 참 부끄럽다. 배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라면서 "이렇게 되면 구단은 결국 '말 잘 듣는' 감독님을 선호한다고 밝힌 거나 다름없지 않나. 다음 감독님이 오신다고 해도 우리가 그 분을 신뢰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며 거듭 한탄했다.
#신임 감독 내정자는 부임 고사
사면초가에 놓인 흥국생명은 빠른 분위기 수습을 위해 새 감독 선임을 서둘렀다. 이영수 코치가 물러난 다음 날, 김기중 선명여고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 또한 결과적으로 '악수'가 됐다. 일련의 사태를 보고 고민을 거듭하던 김기중 감독이 스스로 프로 감독직을 포기한 것이다.
일찌감치 조짐이 보였다. 감독 선임 발표 이틀 뒤인 1월 8일 IBK기업은행과 원정경기가 열렸지만, KOVO는 "흥국생명의 감독 선임 업무가 마무리되지 않아 김대경 코치가 새로 감독대행을 맡는다"고 알렸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 뒤인 1월 10일, 흥국생명은 결국 "김기중 감독이 심사숙고 끝에 감독 선임을 최종 고사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며 "구단은 김기중 감독의 뜻을 존중하기로 결정했다. 당분간은 김대경 코치의 대행 체제로 시즌을 치를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선수단과 갈등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않은 상황에서 조급하게 새 감독을 공개했다가 사후 수습은커녕 또 한 번 헛발질을 한 셈이다.
이뿐 아니다. 구단주와 단장 명의로 재차 발표한 사과문도 다시 도마에 올랐다. "구단의 경기 운영 개입 논란, 감독 사퇴와 갑작스러운 교체로 배구와 구단을 아껴주신 팬들께 심려를 드리게 돼 죄송하다"며 "이 모든 건 배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경기 운영 개입이라는 그릇된 방향으로 표현된 결과다. 앞으로 경기 운영에 대한 구단의 개입을 철저히 봉쇄하고 감독의 고유 권한을 전적으로 존중할 것"이라고 썼다. 얼핏 보면 구단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 같지만, 의식적으로 '경기 운영 개입'이라는 표현을 반복 사용하면서 또 한 번 '선수 기용 개입' 의혹을 에둘러 부인하는 모양새였다. 팬들의 분노는 더욱 불타올랐다.
#감독 없는 한 달, 그래도 1위 탈환
흥국생명은 그 후 60일 가까이 수장 없이 표류했다. 권순찬 전 감독과 이영수 수석코치가 팀을 떠난 뒤라 흥국생명에 남은 코치진은 김대경 코치와 최지완 코치, 둘뿐이었다. 예상보다 더 길게 감독대행을 맡게 된 김대경 코치는 매 경기 전 감독의 역할인 전력분석 회의와 취재진 인터뷰를 마친 뒤 다시 코트로 달려가 공을 때리거나 올리면서 선수들의 훈련을 돕는 코치 역할을 해야 했다. 한때 '김대경 코치도 그만두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지만, 김 코치는 "나까지 팀을 나가면 선수단을 이끌 스태프가 없다. 일단 선수들을 위해 남기로 했다"며 "구단에선 코치를 추가로 뽑아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선수들이 동요할 것 같아서 일단 다른 변화는 주지 않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김 코치가 '투잡'을 소화하는 동안 김연경은 선수단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고 경기력을 안정화하는 라커룸의 리더로 활약했다. 코트 밖에선 동요하던 선수들을 다독였고, 경기 중엔 무서운 집중력으로 적재적소에 꼭 필요한 득점을 올렸다. 그 결과 흥국생명은 시즌 내내 선두를 달리던 현대건설을 무섭게 따라잡았다. 특히 2월 7일 열린 현대건설과 맞대결에서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3-0으로 이겨 승점 3을 확보한 게 결정적이었다. 현대건설과 흥국생명의 승점이 처음으로 60점으로 동률을 이룬 날이었다. 흥국생명은 여세를 몰아 15일 페퍼저축은행까지 꺾고 마침내 시즌 첫 1위로 올라섰다. 김연경은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굴곡도 있었고, 이슈도 많았다"며 "내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금도 어렵게 경기를 치르고 있는데, 김 감독대행과 모든 스태프가 잘해주셨기 때문에 좋은 경기를 하는 것 같다. 앞으로 다시 고비가 와도 잘 넘어서고 싶다"며 기뻐했다.
#세계적인 명장이 왔다
그 후 나흘 뒤 흥국생명은 또 다른 소식을 전했다. 세계적인 명장 마르첼로 아본단자 전 튀르키예항공 감독(53·이탈리아)과 2024-2025 시즌까지 감독 계약을 한 것이다. 아본단자 감독은 1996년 이탈리아 리그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 이탈리아 대표팀 코치, 불가리아·캐나다·그리스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인물이다. 아제르바이잔 라비타 바쿠, 튀르키예 페네르바체, 이탈리아 차네티 베르가모 등 세계적인 클럽팀도 이끌었다. 김연경과는 2013-14시즌부터 4년간 페네르바체에서 호흡을 맞춘 인연이 있다. 김연경은 "시즌 도중에 아본단자 감독님처럼 저명한 배구 지도자를 모시는 일은 쉽지 않다. 프런트가 순조롭게 감독님을 영입해줘서 감사하다"며 반겼다.
김연경에게는 체력적·정신적으로 힘든 시즌이었다. 흥국생명이 시즌 첫 1위에 오른 날, "예전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내려오고 싶었다. 은퇴 시점이 머지 않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올 시즌이 선수로서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흥국생명은 아본단자 감독을 후임자로 선택하면서 "김연경이 있을 때 우승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모처럼 팬들을 환호하게 만든 결단이었다. 아본단자 감독이 "이런 환대는 처음 받아본다"며 흥국생명 팬들의 응원에 감사 인사를 전했을 정도다.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우승을 향해 가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감독 선임이 발표된 19일 GS칼텍스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아본단자 감독의 V리그 감독 데뷔전인 23일 한국도로공사전도 세트스코어 3-0으로 가볍게 끝내면서 취임 선물을 안겼다. 김연경은 "내 은퇴와 관련한 얘기가 너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일단 나는 올 시즌을 우승으로 마무리하는 데 집중하려고 한다"며 "정규시즌 최종전 상대가 현대건설이다. 그 전에 우승을 확정하는 게 우리에겐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각오를 다졌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