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신인들 ‘꿈만 먹곤 못 살아’
얼마 전 정부 고위관계자가 대기업 회장으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이 공개돼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쟁쟁한 인사들의 이름이 거론돼 화제가 된 데다 신인 여자 연예인 두 명이 소속사의 강요로 해당 룸살롱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눈길을 끌었다. 신인 연예인이 유흥업소에서 몰래 일을 하는 사례가 많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사정기관이 작성한 문건을 통해 그 실태가 드러난 터라 더욱 화제가 된 것. 그렇지만 연예관계자들의 설명은 다르다. 생활고와 버릴 수 없는 스타 등극의 꿈, 그리고 스폰서 등 얽히고설킨 신인 여자 연예인들의 현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사정기관에선 어떻게 관련 정보를 수집해서 이런 문건을 작성한 것일까. 확인 결과 문제의 문건은 지난 2009년 신인 여자 연예인 두 명이 소속사 대표를 고소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당시 두 여성은 자신들의 소속사 대표 김 아무개 씨가 룸살롱에 강제로 취직시킨 뒤 봉사료 수천만 원을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해당 연예기획사 대표는 이외에도 몇 가지 추가적인 혐의를 더 받았으며 결국 유죄를 받았지만 집행유예로 실형은 면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그들이 일했던 룸살롱 C 업소 관련 증언이 나왔고 이 과정에서 정부 고위관계자와 대기업 회장이 자주 방문했다는 내용도 흘러나왔다. 이런 내용이 사정기관의 문건에 실리게 됐던 것이다.
당시 정황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단연 혐의를 받은 연예기획사 대표 김 씨다. 그렇지만 그는 언론 접촉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대신 김 씨의 측근을 통해 당시 정황을 들을 수 있었다. 김 씨의 측근은 “김 대표가 억울한 부분이 많다”면서 “김 대표가 유죄를 받긴 했지만 항소할 경우 매스컴에 알려질 우려가 있어 그냥 집행유예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김 씨는 검찰 조사 과정에서 룸살롱 취업은 해당 여성 연예인들이 생활고 등을 문제로 먼저 부탁해와 소개만 해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소개만 해준 터라 봉사료를 주고받는 과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 김 씨의 측근은 “당시 검찰 조사 과정에서 이 부분은 김 씨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혐의가 없다고 판단해 기소조차 되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다.
연예관계자들은 소속 연예인의 룸살롱 취업 알선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연예기획사가 활동 중이다. 유명 스타를 여럿 보유한 대형 기획사부터 스타급 연예인 두세 명에 신인 연예인을 여럿 둔 중소 기획사들, 그리고 스타급 연예인을 보유하지 못한 소형 연예기획사도 엄청나게 많다. 이 가운데에는 소속 신인 연예인과 연습생의 금품을 갈취하고 심하면 성추행 및 성폭행까지 일삼는 무늬만 연예기획사들도 있지만 어떻게든 신인을 스타로 키우기 위해 애쓰는 소형 연예기획사들이 더 많다. <일요신문>의 연재 코너인 ‘느낌이 좋아’에 소개되는 신인 연예인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 이런 소형 연예기획사 소속이다. 해당 코너를 진행하며 알게 된 몇몇 소형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에게 신인 연예인의 룸살롱 등 유흥업소 취업에 대해 물어봤다.
한 소형 연예기획사 A 이사는 “영화나 드라마, 내지는 CF까지 포함해 단역으로라도 출연했던 이들을 연예인의 범주에 포함시키면 그 수가 엄청나다”면서 “당장 몇 년은 스타의 꿈으로 버티지만 서서히 생활고가 그들을 힘겹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불행히도 ‘스폰서’를 구하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의 손님을 상대해야 하는 유흥업소와 달리 개인과의 만남이라 스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우리가 돈 벌려고 스폰서 연결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걔들 사정이 딱해서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받아 연결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그러다 보니 스폰서가 돼 줄 만한 재력과 인맥이 탄탄하다고 알려진 대표나 임원이 있는 소형 연예기획사에 애들이 몰리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 소형 연예기획사의 B 대표는 “연예계에서 활동하려 하는 애들이라 대부분 외모가 출중한 편이지만 누구나 손쉽게 스폰서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정말 출중하게 예쁘거나 스폰서의 취향에 잘 맞거나 내지는 지금은 잊혔을지라도 잠시나마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친구들이 스폰서를 구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스폰서를 구하는 데 실패할 경우 룸살롱 등 유흥업소로 간다. 이 경우에도 봉사료 등으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라면 소속사 몰래 일자리를 구한다고 한다. B 대표는 “기사 나온 걸 보니 대기업 회장까지 자주 오는 술집이었다는데 그런 고급 술집에서 한두 달 일하게 해주는 경우는 손님들 가운데 스폰서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사실상 접대로 돈을 벌기보단 스폰서를 구하려 그런 고급 술집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신인 연예인이 많다”고 설명한다. 또한 “물론 연예인의 꿈을 접고 아예 다른 길을 가는 애들도 많지만 어린 나이부터 연예인만을 바라본 애들이라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곧 뜰 거라는 기대를 못 버린 애들은 스폰서라도 구해 조금 더 버티려 한다”면서 “그러다 서서히 꿈을 접고 이 바닥을 떠나게 되는데, 그런 애들이 찾는 곳이 이미 경험을 해봤던 유흥업소들이다”라고 덧붙인다.
물론 모든 소형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스폰서나 룸살롱 일자리를 주선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에서 소개비 등을 받아가는 등 금품을 갈취하는 데 더 집중하는 이들도 있다. 신인 연예인이 먼저 원한 게 아닌 소속사 차원에서 강제로 스폰서를 소개해주고 유흥업소에 나가도록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20대 초반 신인 연예인들 가운데 이런 피해를 입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취재 과정에서 만난 소형 연예기획사 관계자들도 이런 폐해가 존재함을 인정했다. 다만 기형적인 연예계 구조에서 ‘신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오직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도 생활고는 존재하고 이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현실이 스폰서에 급급해 룸살롱까지 나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A 이사는 “지금이라도 뜨면 신인상을 받으니 ‘신인’이라 부를 수 있지만 실제는 ‘무명’인 20대 중후반 여자 연예인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라며 “그들의 현실은 모른 채 ‘연예인’이라는 단어에 세상과 언론이 너무 호들갑만 떨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