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52>
▲ 소주고리에서 술내리기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이강주(梨薑酒) |
춘향전에 등장하는 월매는 매사에 준비가 철저한 어미였다. 이도령이 백년가약을 맺으려고 춘향집을 찾자, 이런 날을 대비해서 그동안 준비했다며, 산해진미와 갖가지 술을 내놓는다.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歌)의 한 대목을 보자.대(大)양푼 가리찜, 소(小)양푼 제육찜, 풀풀 뛰는 숭어찜, 포도동 나는 매추리탕에 동래(東萊) 울산(蔚山) 대전복 대모 장도 드는 칼로 맹상군(孟嘗君)의 눈썹처럼 어슷비슷 오려 놓고, 염통산적, 양볶이와 춘치자명 생치 다리, 적벽 대접 분원기에 냉면조차 비벼놓고 생률 숙률 잣송이며 호도 대추 석류 유자 준시 앵두 탕기 같은 청술레를 칫수 있게 괴었는데…(중략)…술 이름을 이를진대 이적선 포도주와 안기생 자하주와 산림처사(山林處士) 송엽주와 과하주, 방문주, 천일주, 백일주, 금로주(金露酒), 팔팔 뛰는 화주, 약주, 그 가운데 향기로운 연엽주 골라내어(중략) 불한불열(不寒不熱) 데어 내어 금잔 옥잔(玉盞) 앵무배를 그 가운데 데웠으니(후략)
▲ 술빛이 흰 노을과 같다는 백하주. 이종현기자 jhlee@ilyo.co.kr |
월매가 사위 이몽룡에게 주려고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 술은 연엽주(蓮葉酒: 연잎술)였다. 늦여름이나 입추 전에 채취한 연잎을 술에 넣는 가향주(佳香酒)이자 계절주다. 가을로 접어들 무렵이면 연잎의 수분이 점점 줄어들면서 향이 좋아진다. 연꽃은 동트기 전에 ‘벅’하는 소리를 내며 꽃망울을 터트린다. 옛 선비들은 이 소리를 ‘개화성(開花聲)’이라 부르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연엽주는 그런 풍류와 잘 어울리는 술이다.
이외에도 우리 선조들의 상상력과 풍류를 엿볼 수 있는 전통 술 이름들이 꽤 많다. 술빛이 흰 노을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백하주(白霞酒), 푸른 파도와 같다는 녹파주(綠波酒), 푸르고 향기롭다는 벽향주(碧香酒), 차마 삼켜 마시기 아쉽다는 뜻의 석탄주(惜呑酒) 등이다.
▲ 전통주는 우리의 기후와 풍류를 닮은 술이다. 사진은 전통주 시음 행사 장면. 이종현기자 jhlee@ilyo.co.kr |
우리나라 술 종류를 가장 많이 기록한 책은 19세기 초에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다. 술 이름이 무려 170여 가지나 나온다. 일부 전문가들은 조선 말기까지 600여 종이 넘는 우리 술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다양한 술이 존재했던 셈이다. 명망이 높은 집안에서 제사에 쓸 술을 직접 빚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9년 8월 이명박 정부는 ‘우리술 복원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임원경제지 등 옛 문헌에 기록된 전통주 제조방법을 과학적으로 복원해 50종을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전통술이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다. 희석식 소주와 맥주와 위스키, 서양 포도주에 밀려 우리의 기후와 풍류를 닮은 술이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