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독의 ‘여인’…도청으로 뜨고 지다
▲ <뉴스오브더월드> 편집장이었던 레베카 브룩스는 도청 혐의로 구속됐다. EPA/연합뉴스 |
브룩스가 거쳐 간 길을 살펴보면 예고된 비극일 수 있다. 그는 <뉴스오브더월드>의 평기자로 활동하던 1990년대 초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불륜 상대인 제임스 휴잇을 전화 도청해 은밀한 대화를 기사화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도청에 대한 심증만 무성할 뿐 입증을 하지 못해 넘어간 경우지만, 경찰 쪽에 인맥이 닿아 도청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브룩스가 한번 불륜 사실을 대서특필하자 동료 기자들은 물론 타사 기자들까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다이애나를 쫓아다녔다. 다이애나는 자신의 사생활을 하이에나처럼 파헤치는 파파라치들을 피해 다니다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다.’ 브룩스를 일러 한 말인 듯하다. 브룩스는 호텔에 청소부로 변장해 잠입한 후 경쟁 신문사의 기자가 쓴 원고를 훔쳐 그대로 게재한 의혹을 받기도 했다. 정원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브룩스는 집안이 특별히 좋은 건 아니었다.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공부했다고 말했지만 “졸업은커녕 학교를 다녔다는 증거도 불확실하다”는 학력 위조 의혹에 시달렸다. 의혹에 시달려도 태연하게 “공부했다”고 말하는 브룩스의 ‘철면피’는 뻔뻔함을 넘어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무기다.
▲ 불법도청 사건으로 지난해 결국 168년 만에 종간한 <뉴스오브더월드>. EPA/연합뉴스 |
취재력뿐 아니라 처세에도 능했다. 브룩스는 2009년 41세의 나이로 세계 최대 규모의 미디어그룹인 뉴스인터내셔널의 최고경영자(CEO)에 오른다. 대중지인 <더선>과 <더타임스> 등 뉴스인터내셔널 산하 신문들이 영국 신문시장에서 점유한 비율은 약 35%에 이른다. 뉴스인터내셔널은 뉴스코퍼레이션의 모기업으로 영국에 위치하고 있는데, 뉴스코퍼레이션의 대표이사는 언론 황제 루퍼드 머독이다.
머독은 과감한 사람이다. 자기 사람이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내친다. 그런 머독이 도청 사태가 터지자 “브룩스는 불법 취재에 대해 전혀 몰랐을 것이다”고 옹호한 것이나, 브룩스에게 “도청 파문이 사그라질 때까지 잠시 여행을 다녀오라”고 권한 것을 보면 두 사람 간의 끈끈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브룩스는 기자 시절 머독이 지지하는 정당에 따라 정치인들과 친분을 쌓거나 머독과 틀어진 인사에 대해선 지면을 통해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자신의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는 정치인이라면 동성 취향을 꼬집어 남성끼리 성행위하는 장면을 묘사한 만평을 실었다. 행사장에서 그 정치인을 만났을 때 “만평이 어땠냐”고 쏘아 묻기도 했다.
브룩스는 타블로이드에 특화된 기자였지만 공익을 위한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편집국장으로 있는 동안 <뉴스오드더월드>의 지면을 통해 정부에 아동 성범죄자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기자들을 독려해 아동 성범죄 관련 기사들이 쏟아냈다. 브룩스는 지난 2001년 공영방송 BBC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아동 성범죄자의 신상을 요구하는 인권 운동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면을 통해 범죄의 심각성을 끊임없이 알릴 것이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를 가진 주간신문의 수장인 브룩스가 선도한 운동은 결실을 맺는다. 지난 2000년에 무참히 살해된 아동 성범죄 피해자인 사라 페인의 이름 딴 ‘사라 법’이 2008년 제정된다. 사라 법의 핵심 조항은 성범죄자들은 출소 후 72시간 내에 인근 경찰서에 자신의 거주지 등 인적을 등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라법이 제정되던 해 브룩스는 공로를 인정받아 런던대학교가 주관하는 기자상을 수상한다.
말하자면, 도청 사태는 브룩스에게 ‘내리막’을 의미한다. 최근 런던대학교는 도청 취재에 반발한다는 의미로 브룩스의 기자상 이력을 박탈했다. 일간 <가디언> 등 정론지는 이참에 언론계에서 퇴출시키려고 작심한 듯 브룩스와 유착한 정치인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브룩스는 도청 피해를 축소하거나 은폐하려는 혐의로 구속됐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지난해에 이어 도청 혐의로 두 번째로 구속된 것이다.
파상 공세에 몰린 브룩스가 언론계를 완전히 떠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이달 초 브룩스는 남편 찰리 브룩스 사이에서 여자 아이를 출산했다. 보도된 사진 속에서 브룩스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지만, 아이를 안은 모습에서 진한 모성애를 느끼게 한다.
물론 평범한 주부의 삶은 브룩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남편은 절대 눈을 팔지 않아야 한다. 2003년 브룩스는 전 남편인 로스 캠프의 외도를 잡아내려고 부하 기자들을 풀어 추적했다. 외도한 단서를 잡았는지 집안에서 남편을 폭행한 혐의로 그해 경찰에 긴급 체포되었다. 브룩스는 거리에서나 집안에서나 저돌적인 기자정신을 발휘한다.
이승환 영국통신원 world@ilyo.co.kr